<네가 되어 줄게> / 조남주
왜 하필 윤슬이가 됐을까. 종종 윤슬이에게 '나도 내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슬이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나에게도 나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 조금 낯 뜨겁지만. 내가 완벽한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엄마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과 시간을 최대한 윤슬이에게 맞춰 온 것은 사실이다.
글씨를 읽을 줄 알게 된 후에도 윤슬이는 책을 읽어 달라고 했다. 내 품에 파고들어 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서, 억지로 눈을 감으며 가짜 잠투정을 했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이던 눈동자. 그 모습이 귀여울 때도 있었지만 막막할 때가 더 많았다. 너는 언제 크지? 도대체 얼마나 더 키워야 혼자 씻고, 자고, 밥도 차려 먹을 수 있지? 그때 윤슬이는 내 마음을 들었을까. 마지막 페이지에서 또 눈물이 고였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겨우 눈물을 참았다.
"뭐 좀 되는 아이디어다 싶으면 다 있더라고, 닫힌 공간에 원시 시대 환경을 만들어서 생명체가 생기는지 실험하는 거, 어떤 과학자가 벌써 해 봤다며? 창문 안 열고 환기시키는 장치도 이미 있고 돈 너무 많이 쓰지 않게 카드 사용 금액을 제한하는 것도 있대고, 자기 재산 없이 같이 만들고 같이 쓰면서 집단생활하는 것도 해 봤고. 심지어 거꾸로 접는 우산도 있어. 늦었어.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났어.
"거기에 네 아이디어를 더해봐. 카드에 다른 기능을 넣는다든지, 거꾸로 접는 우산에 신소재를 쓴다든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다 만들어진 레고에 블록 하나 더 꽂는 게 아니라고. 나는 새 레고 판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 가 블록을 꽂아서 내 작품을 만들고 싶어."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렇다고 꽂혀 있는 걸 뺄 수는 없다고 했던가. 레고판부터 사 줘야겠다고 했던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농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이제야 윤슬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짐작해 본다. 블록이 빼곡히 꽂힌 레고 판을 앞에 두고 자신의 블록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고 여겼을 마음을 가늠해 본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는 윤슬이가 부럽다. 하지만 그래서 생기는 어떤 막막함도 있을 수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만 흐르는 건 아닌 것 같아, 미래의 일 덕분에 과거가 다시 이해되기도 하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기준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사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지."
"뭔 소리야. 유행은 돌고 돈다, 그런 뜻이야?"
"나이를 먹으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게 되더라고. 예지력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데이터가 쌓이고 재조합되면서 과거의 일들뿐 아니라 미래의 일들도 그냥 알게 돼. 의미를 몰랐던 일들을 뒤늦게 깨닫고 나면 과거 어느 지점에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도 하고."
진짜 뭔 소리야, 그랬었다, 그때는.
시간이 이렇게 이상하게 꼬여 버리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우리가 이상은을 들은 건 우연이 아니라, 이상은을 좋아하던 중학생 최수일의 필연적 미래였다.
나와 열 달 동안 한 몸이던, 그러고도 한참을 내 품 안에 있던 아기는 이미 우리의 세상에서 한 발을 뺐다. 윤슬이는 요즘 나에게서 부쩍부쩍 멀어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친구,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약속, 내가 사주지 않은 펜과 머리핀, 화장품, 닫힌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통화 목소리, 나에게는 말하지 않는 고민, 기쁨, 슬픔, 분노들. 적당히 눈치채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하고,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했다.
윤슬이는 윤슬이의 시간, 윤슬이의 공간, 윤슬이의 인간관계를 만들며 자신만의 세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가는 중이다. 그걸 잘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기다리고 돕는 게 내 역할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떠나보내려고 시작하는 관계가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관계가 또 있을까.
나는 윤슬이의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윤슬이가 더 보고 싶어졌다. 윤슬이의 마음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내가 기억 못 한다는 거 엄마도 알고 있을걸? 내 기억이나 감정이랑은 상관없어. 엄마 마음의 문제인 거지.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야."
무릎을 당겨 앉아 본다. 그날 밤에도 이렇게 앉아 있었지. 세상에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벽에 걸린 달력이나 화분 같다고 생각했다. 없으면 조금 불편하고 허전하겠지만 있으면 있는 줄도 모르는 그런 존재. 언젠가 나를 진짜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길까 궁금했다. 내가 먼저인 사람, 아니 전부인 사람,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내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내 간절한 바람이 2023년의 윤슬이를 1993년으로 불러왔던 걸까. 그럼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윤슬이인가.
분만실에서의 첫 눈맞춤을 기억한다. 간호사 선생님이 품에 안겨 주었는데 퉁퉁 불은 신생아가 울지도 않고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았더랬다. 내가 잠깐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 시절을 지나, 내 머리칼을 꼭 쥐고 자던 어린이 시절도 지나, 이제 너무 많이 멀어지고 너무 많이 싸우게 됐지만 돌이켜 보면 먼저 사과하는 쪽은 항상 윤슬이었다. 카톡창을 가득 채우던 귀여운 하트 이모티콘들. 때로 실망하고 후회하고 도망가고 싶던 내 마음을 윤슬이는 짐작도 못 하겠지. 내가 먼저인 사람, 내가 전부인 사람,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내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 람, 윤슬이었구나.
엄마가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저 미끄럼틀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까?"
"어쩌면?"
"혹시 또 가 보고 싶은 데가 있어? 과거든, 미래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지금, 여기가 좋아."
"엄마도?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끄럼틀을 구경하다가 돌아섰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올여름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할 때 들고 갈 책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들은 라디오를 통해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신작이 나온 사실을 알았다.
당장 책을 사고 싶어 안달이 났던 건
지난했던 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이 무사히 끝난 날 서점에서 본
'아들'에 대한 책을 하릴없이 집어 들던 것과는 또 다른 마음 때문이었다.
사춘기인 아이를 이해하고 싶기도 했지만
나를 이해받을 수 있는 문장들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사실 더 컸다.
알고 보니 청소년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는 이 소설은
그래서인지 읽기에 참 수월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처럼 나는 문장들에 위로를 얻었다.
엄마로서, 그리고 여전히 딸인 나로서 필요한 위로를.
늘 삶이 고단한 엄마에게 나는 위로받기를 기대할 수 없는 딸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위로받지 못하고 지나간 딸로서의 내 삶이 엄마로서 연차가 쌓일수록 나는 어쩐지 더 서럽다.
그럼에도 기댈 수 없으므로,
정확히는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나는 엄마의 위로 대신 이렇듯 다른 방편을 찾는 거다.
‘... 엄마 마음의 문제인 거지.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야.’
내 삶을 위해,
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예전보다 엄마를 덜 위로하는 딸이 되기로 하면서부터
내가 마치 주문처럼 외는 말이 나와서
나는 이 문장을 쉬이 넘어가지 못했다.
이 문장을 빌어 나는 한 번 더 마음에 힘을 주어 다짐했다.
엄마의 몫을 나눠지지 못한다 자책하지 말자고.
지금은..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의 곁을 잘 지키자고.
문장과 여행이
이번에도 나에게 답을 주었다.
돌아온 이 일상 속에 그 답을 잘 심어 가꾸어 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