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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Jul 24. 2019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 또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즉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듯하지만, 정작 그것을 돌이켜보는 것은 안타깝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곳에 대한 기억과 그곳에 대한 기대에는 모두 순수함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도드라져 나오는 것은 장소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나무 오두막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 한다.’

‘플로베르와 이집트의 평생에 걸친 관계를 보면 우리도 어떤 나라에 느끼는 매력을 심화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플로베르는 사춘기 이후로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증오는 너무 강렬하여, 그는 자신이 프랑스 국민이라는 사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는 국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다. 출생지나 선조를 따르지 말고,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를 따르자는 것이었다 [그가 정체성에 대한 이런 유연한 개념을 성과 종에까지 확대한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이따금씩 자신이 사실 여자이고, 낙타이고, 곰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곰을 사고 싶다. 곰을 그린 그림 말이다. 그것을 액자에 넣어 내 침실에 걸어두고 싶다. 그리고 나의 도덕적 경향과 사회적 습관을 보여주기 위해 그 밑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초상>이라고 적어두고 싶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나의 발견은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니체는 또 두 번째 종류의 여행도 제안한다. 이는 우리의 사회와 정체성이 과거에 의해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자신의 집, 자신의 종족, 자신의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호기심은 몇 가지 크게 뭉뚱그려진 질문들로 이루어진 중추로부터 밖으로, 때로는 아주 먼 곳까지 확장되는 작은 질문들의 사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시인(워즈워스)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고립된 농가에 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초기 시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워즈워스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나중에 반 고흐는 동생에게 파리에서 아를로 이사 온 이유를 두 가지 댔다.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 즉 화가는 세상의 한 부분을 그릴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 머문 지 몇 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 가운데 그가(반 고흐) 관심을 가지는 부분 때문에 가끔 왜곡, 생략, 색깔의 대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가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현실-'닮은꼴'-이었다. 그는 더 깊은 사실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소박한 사실주의를 희생시키려 했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작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러스킨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다."'

'...그는(러스킨) 우리 모두가 적절한 '말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분석하는 데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여행의 기술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니 이 책의 제목은
내가 여행을 시작한 후부터 몇 년간 나에게 추궁하듯 물었던 질문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나는 즐겁게 여행을 하면서도 꼭 이 질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유를 찾지 않고서는 도통 내 여정을 끌어갈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끊임없이 각자의 '이유'를 찾아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보통의 여행이 궁극적으로는 즐거움, 기쁨, 희열로 귀결되겠지만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것 이상의 여행을 권하는 것이다.

그는 나처럼 다소 고지식한 면이 있는 치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각에 동의되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여행이나 삶을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으면서도
나는 러스킨이 강조한 제대로 된 '말 그림'을 그릴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여 사색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태도를 점검해 나가는 것이 까다로워 보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것이 내 삶의 속도를 꽤 늦출 수 있지만
한 발자국 내딛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미소 지으며

다시 앞으로 향할 힘을 장전할 수 있게 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계속 나는 여행을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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