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적 독립
읽던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을 고르려고 책꽂이를 둘러보았는데 딱 눈에 띄었던 종이밥
하지만 책다운 책을 읽고 싶어 (=오랫동안 책에 스며들 수 있고 완독 후에도 여운이 남았으면 하는 마음) 몇 번을 외면하고 외면하다 계속 눈에 띄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냉큼 집어 들었다.
중학생 필독도서였던가 아니면 우리 반 만의 선정도서였던가 십시일반과 함께 반 친구들끼리 다 읽고 다음 친구에게 넘겨주는 독서릴레이로 읽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쳤던 중학생 때의 나는 종이밥을 읽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사춘기 소녀의 예민한 감성 또는 감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짧지만 강하게 마음을 울렸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마음일까? 식어가고 있는 현재의 나의 가슴은 어떤 감정을 느낄지 궁금하기도 했다.
고작 백여 페이지, 글자 크기를 감안하면 같은 분량의 다른 책의 3분의 2 정도의 내용이 다 큰(다 컸다고 생각했던, 정확히는 몸과 다른 마음의 나이가 있다면 아직은 몇 살인지 모를) 나를 여러 번 울컥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손주들을 생각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아이들이 안타깝고 애잔해 힘에 부치지만 최선을 다해 키우려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둘째는 그중에서도 몸이 약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경제를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인 할머니가 부러 표현하는 강인함이다. 손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 한 번 할머니가 새벽에 ‘몰래’ 우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할아버지도 손자도 깨게 되어 더 이상 몰래가 아니게 되었지만) 할머니가 가족 앞에서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셋째는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미안해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다. 평생 모진 일을 하시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오시다가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된 상황인데, 그냥 집에만 계시기에는 마음이 불편해 도저히 안 되겠는지 완쾌되지 않은 몸을 기윽고 끌고 나가 일을 하다 또 한소리를 들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요”라며. 이제까지 열심히 일하시다 잠시 쉬는 것도 편하게 쉬지 못하는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럽고...
넷째는 주인공인 막내 송이 때문인데, 송이는 가장 철없고 어리광쟁이에 말괄량이이다. 못 사는 형편 때문에 예쁜 옷, 예쁜 가방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밉기도 부럽기도 질투 나기도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툴툴거리고 모진 말도 하지만 사실은 송이도 꽤나 철이 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키워 주시는 걸 완벽하게는 알지 못해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쯤은 마음으로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늘 괜히 막냇동생 역할을 자처해 집안에 웃음꽃을 피운다. 그게 대견하기도 하면서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피부로 깨달은 어린 아이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환경을 첫째라는 이유로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버린 첫 손주 때문이다. 이 책의 화자이기도 한 장남은 어리광 피우는 어린 동생을 귀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꽤 예뻐한다. 본인도 아직 어린데 부모님의 부재를 채워야 하는 부담감과 조부모님의 희생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책임감 때문인지 초등학생인데도 철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는 아이다운 게 좋은 것 같다’라고. 언젠가부터 철이 일찍 든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감정을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면 한창 어리광 부릴 나이에 “괜찮아요”라는 말을 달고 살까. 함께 짓는 그 미소가 나에게는 아프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 아이를 보면 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어리광 피워도 된다고,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뚫릴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떠한 연유로 어릴 때 심적으로 온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 사람들 중 ‘허구적 독립’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겉으로는 독립을 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허구적 독립을 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본인의 나이보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성향을 극복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에도 그러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거다. 겉으론 독립성이 강해 보이고 혼자 뭐든지 척척 잘 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내면의 어린 아이가 독립을 하지 못해 겉으로 계속 더 강한 척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언제까지나 아이다웠으면 좋겠다. 그때만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그때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아무런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아이답게.
결국 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게 만든 것도 송이의 의연함과 첫째 손주에 대한 애처로움이었다. 십 년이 더 지난 그때의 눈물과 지금의 눈물은 어떤 차이일까?
해어진 종이를 넘길 때마다 괜히 밥풀 냄새가 스멀거리는 것 같다.
당신의 마음속에선 어떤 냄새가 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