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해사하다.

최애 업고 튀어

by 편린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는 우리가 값진 표현들을 얻어 더욱 풍성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는 연재 노트입니다. 매주 월요일, 신선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하나씩 새겨보세요-!
1) 얼굴이 희고 곱다랗다.
2) 표정, 웃음소리 따위가 맑고 깨끗하다.
3) 옷차림, 자태 따위가 말끔하고 깨끗하다.


햇병아리 신입사원 시절부터 어느덧 묵직하게 한자리를 지키던 대리 연차까지. 쉴 틈 없이 내달리던 회사 생활 중 언제나 주변에 입버릇처럼 흘리던 다짐이 하나 있었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내 오랜 최애를 만날 기회를 얻는다면, 그때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깔끔히 물러날 거라는 농담 반 진담 반 미션 보드. 하지만 나는 어느새 그런 순진무구하고도 파릇한 마음을 뒤로한 채, 과중한 업무의 굴레 안에 파묻혀 겨우겨우 연명하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겨우내 한껏 웅크리던 나무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기 시작한 4월이 돌아왔고, 숨죽이던 일상에 새 숨을 불어넣을 만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건 바로 나의 오랜 최애 배우 ‘변우석’이 출연할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홍보 차원에서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커피 나눔 이벤트를 한다는 것. 그 소식 하나로 총 18층에 이르는 사옥 전체가 얼마나 들썩거렸는지 모른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엄청난 여초 회사다.)


아주 오랜만에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최애 영접이 뭐길래. 이벤트 때 입을 옷을 준비하고, 머릿결을 정돈하고, 메이크업 도구를 새로 장만하며 다가올 그날만을 기다렸다. 모두들 한 번씩 던지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봤자 그 사람은 너 몰라." 그치만 단 1초의 대면이라 할지라도 내 미약한 존재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지사 덕후의 마음.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고,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왔던 최애를 코앞에서 마주하겠다는 의지로 반차까지 내고 회사 로비에서 긴긴 대기를 탔다. 맨 앞줄을 당당히 차지하고 기다리던 끝에 이벤트 시간이 다가왔고, 이내 등장한 그의 미안은 단연 광채를 뿜어냈다. 방송국을 다니던 수많은 계절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연예인을 마주했고, 더 이상 반짝이는 그들이 내게는 동경의 대상이 아닌 지 오래였다. 그렇게 고장났던 심장이 다시금 쿵쾅쿵쾅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코앞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은 정말 해사하다는 표현으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사옥 1층 로비 천정에 머리가 닿을 듯 훤칠한 신장과 호리호리한 풍채, 귀공자스러운 옷맵시와 헤어스타일, 맑고 산뜻한 미소로부터 한가득 번지는 햇살 같은 기운, 희고 고운 얼굴, 말끔하고 통쾌한 웃음소리, 멀끔한 자태로 이루어진 그는 과연 해사함의 결정체였다. 그 후로 나는 아직까지도 그를 뛰어넘는 존재감을 사람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다.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특유의 온기까지 환하게 내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매력의 소유자가 아닐까. 그런 결을 지니기 위해서는 단정한 마음가짐,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태도, 겸손한 자세 같은 것들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걸 모두 지닌 게 내 최애였다. 자신만의 아우라로 주위를 온통 화사하게 밝히는 사람. 그게 그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겠지. 회사로부터 북받치는 선물을 받아낸 나는 마침내 시원함을 등에 업고 퇴사를 감행했고, 도처에 흘려두었던 허풍 같던 다짐을 온전히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행적이 누군가에겐 가벼웠던 다짐과 경솔한 결말처럼 비칠지는 몰라도, 사실 빛나는 누군가를 줄곧 정성스레 바라보던 마음이 힘든 시기를 버텨낼 구원 같은 것이었음을 나는 안다. 나의 버팀목 같던 지난날의 사랑에 감사한다.


그렇게 나는 정말 최애를 등에 없고 회사에서 튀어버렸다.



연재 브런치 북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들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그 외 기타 문학 속 표현들을 참고하여 쓰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yeonri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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