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위다.

불멍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나요.

by 편린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는 우리가 값진 표현들을 얻어 더욱 풍성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하는 연재 노트입니다. 매주 월요일, 신선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하나씩 새겨보세요-!
1) (사전적)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되다.
2) (문학적) 무언가가 서서히 희미해지다.


나를 지탱하던 열정의 기운이 사위어갈 때면, 나는 어김없이 '불멍'을 택했다. 과열된 채로 애쓰길 반복하다 어느 날 지쳐 누워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지러이 누비고 다니길 좋아하는 나만의 특색 있는 자유분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질주하는 날들을 피해 이따금씩 홀로 보낼 고독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그 고독 안에서 작지만 강렬한 생동을 느낄만한 어떠한 장치가 있다면 더없이 좋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예고 없이 떨어지는 유성우, 어둠 속에서 소심히 불을 밝히는 반딧불이 같은 것들 말이다. 인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불씨들은 늘 강렬히 타오르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을 늘어지게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모든 번잡함이 편히 잠들었다. 적막이 깔린 밤, 불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개의 숨결만이 고요히 남은 자리에서는 오롯한 사색이 시작되니까. 그리 멍하니 보내는 시간 안에는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다. 오로지 내 의지로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었다.



제주시 서귀포 안덕면의 저 안쪽. 한라산의 중턱 즈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천혜의 마을 스타빌이 품은 가을 안에서 불멍을 즐겼던 시간을 되감는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한두 마리의 사슴과 고라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반기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둥그렇게 자리 잡은 흰색의 유르트 텐트들과 그 주위를 안락하게 휘감은 베이지 억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불구불 오솔길에는 때마침 하천에서 나와 쪼르르 산책 중인 오리 세 마리.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에는 흰빛이 반뜩거리는 선베드와 에메랄드빛이 일렁이는 수영장이 수채화처럼 놓여있었다. 이리저리 오가며 온종일 따사로운 물놀이를 즐기다 보면 금세 불타는 노을이 찾아들어 짧게 얼굴을 내비치고는 점차 사위어갔다. 한참을 그러고 난 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반짝임들이 밤하늘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서는 별들의 밝기에 답신이라도 하듯 덩달아 빛나는 캠프파이어가 강렬히 타올랐다. 밤길이 가로등 하나 없이 이렇게나 밝을 수 있다니. 그 앞에서 투박한 맛을 자랑하는 통밀 크래커와 주먹만 한 크기의 뭉텅이 마시멜로, 어린아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초콜릿 크림, 길다란 꼬챙이를 들고 와 나만의 스모어를 구웠다. 불길 안쪽에서 한바탕 구워내다가, 훈훈한 차를 한 잔씩 마시기를 반복했다. 소등이 끝난 밤, 조용한 마을을 붉히는 매일의 행사.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 새벽을 다 보내버렸다.


속 시끄러운 밤을 보내길 즐겨 하는 사람이 불멍을 사랑하는 이유는 사위어가고 또다시 피어오르는 불길이 알 수 없는 응원의 손길을 내밀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슬픔에 잠식당하더라도 언젠가 또다시 밝게 타오를 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시간을 지낼 수 있어서. 내 안의 장작을 태우고 태우다 마침내 맞이한 불멍은 내게 그런 힘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열정에 사로잡힌 날들이 미운 건 아니다. 가끔씩 이리 숨 쉴 틈을 내주고 나면 언제나 힘차게 살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으니, 그게 좋다는 거다. 하얗게 불태우는 날들은 그 날들대로 빛나고, 사위어가는 순간은 그 순간대로 빛나서 나를 더 온전히 채우곤 하니까.



연재 브런치 북 『 표현 수집가의 말맛 노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들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그 외 기타 문학 속 표현들을 참고하여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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