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3년 된 노트북을 쓰고 있다. 부팅에만 몇 분이 걸린다. 얼마나 느린지 별명이 '슈퍼거북'이다. 그런 슈퍼거북이 얼마 전부터 액정도 깜빡였다. 수명을 다하는 모습에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합한 사양을 며칠 동안 고민하다 드디어 결정하고 A매장으로 갔다.
전시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매니저가 다가왔고 나는 적어간 모델명을 내보이며 사고 싶다고 했다.
"이 모델 어디서 보셨어요?"
"온라인 홈페이지에서요."
"온라인이랑 오프라인은 모델명이 좀 달라서요. 그 모델은 매장에 없어요. 이 모델은 어떠세요? 지금 행사 중이에요."
"아..."
"3일 간만 하는 행사라 지금 하시는 게 좋아요."
내가 사고 싶은 모델과 행사 중인 상품의 차이점이 확실히 뭔지 궁금했지만 매니저는 비슷하다는 말만 했다. 순간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메모리와 하드, cpu 등 구체적인 차이점이 알고 싶었으나 매니저의 뚱한 표정에 그냥 생각해 보고 오겠다고 돌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매장에서 본 행사 모델과 내가 사고 싶었던 모델을 비교해 봤다. cpu사양, 그래픽카드, 출시 연도, 색상등이 달랐다. 두 개의 모델을 두고 이틀을 고민하다 그래도 내가 사고 싶은 모델로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A매장이 아닌 B매장으로 향했다.
B매장에 가니 내가 사고 싶은 모델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온라인으로 본 가격보다 더 쌌다. 단, 특정 카드로 결제했을 때... 난 그 카드가 없는데... 그 카드가 없다면 40만 원을 더 주고 사야 한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매장에 아무도 없다. 대형 마트 한쪽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이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직원이 아무도 없을 수가 있을까? 결국 긴 기다림 끝에 돌아 나왔다.
그리고 한 블록 옆에 있는 C매장으로 갔다. 큰 규모의 매장으로 서비스 센터까지 같이 있는 곳이었다. 매장에 들어가 노트북이 전시된 곳으로 갔다. 그곳엔 내가 사려는 모델은 없었다. 한참 서성여도 아무도 오지 않아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사고 싶은 모델을 말했다. 그 직원은 A매장 매니저처럼 내가 사고 싶은 모델은 지금 행사하는 모델과 비슷하다며 cpu사양 빼고 다 같으니 행사 상품을 추천했다. 내심 둘의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더 싼 행사모델로 살까 흔들리고 있는데
"고객님 카드 하나 만드시면 더 할인받으실 수 있어요, 무이자 36개월 가능하시고요, 한 달 30만 원 이상 실적 충족하면 더 할인받으실 수 있어요. 카드 하나 만드세요."
그런데 나는 노트북이 사고 싶어 왔지 카드를 만들러 온 게 아닌데... 노트북이 아닌 카드 설명이 계속 됐다. 결국 나는 생각해 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 나왔다.
그리고 다시 A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에는 그때 그 매니저는 없었고 다른 직원이 나를 보자마자 다가왔다. 내가 사고 싶은 모델명을 말하자 어김없이 행사 중인 모델은 어떠냐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품 카탈로그를 가져와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중간에 말을 끊고 싶지 않아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가격도 자세히 알려주며 행사 할인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줬다. 특정 카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럼, 그걸로 주세요.' 하고 바로 결재하고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네 번의 매장 방문 끝에 나는 새로운 노트북을 살 수 있었다. 제품을 구매할 때 나는 이것저것 따져보는 걸 좋아한다. 특히나 전자 제품은 스펙은 어떤지, 사양 차이는 무엇인지, 모델명이 의미하는 건 뭔지, 가격대비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등등 그런 것들이 내 구매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제품 외의 구매 조건이 생긴 것 같다. 제품의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 돼 강요하지 않는 곳. (아마 낯가리고 소심하고 경계심이 강한 나의 성격 탓이겠지.)
집에 와서 노트북을 개봉하려는데 직원분이 문자를 보냈다.
'저도 기분 좋게 노트북을 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리고 문득 든 생각 하나. 그분에게 나는 어떤 판매의 조건에 해당되었던 걸까?
분명 그분도 모든 사람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서로의 조건이 딱 들어맞았던 그 지점을 되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