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과 비움

by 꿈꾸는나비

토요일 저녁, 냉장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상하네'하고 그냥 무시했다가 일요일 저녁 CH라는 에러코드가 떴다. 찾아보니 이건 온도저하로 인한 에러인데 대부분 컴프레서 교체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한다. 부랴부랴 온라인으로 가장 빠른 A/S를 찾아보니 2주나 걸린단다. 이런... 주말이니 고객센터 연결도 안 된다. 냉장고의 냉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이건 재앙이다.


월요일 9시가 되자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상담원과 연결되었고 수요일 오후에 예약이 하나 취소되었다며 일정을 조정해 줬다. 2주에서 이틀로 시간이 줄긴 했지만 냉장고는 이미 냉기를 잃었고 냉동고는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난리 속에도 운이 따랐으니 냉동실 안에 내가 쟁여둔 아이스팩이 열개정도 있었고 마침 최근에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다!

냉동실에 급한 것들은 부랴부랴 챙겨 친정에 보내고 나머지 녹는 것들은 아이스팩과 함께 보냉백에 넣어 실외기실로 가져갔다. 그렇게 냉장고와 냉동실을 모두 비워내는데 한도 끝도 없이 뭐가 계속 나온다. 마치 냉장고 너머 저편에 다른 차원이 연결된 것 마냥 엄청난 양의 음식과 식재료가 쏟아져 나왔다. 미식가도 요리사도 아닌 나에게 이런 것들이 다 필요했던가. 그런데도 왜 나는 매주 장을 봤던가. 언제 쟁여뒀는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봉지들을 보고 있자니 이건 재앙이 아닌 기회다 싶다. 비워내야 할 때다.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필요한 것만 정리할 기회.


그렇게 모든 것을 비워내고 서랍과 트레이를 하나하나 분리해 이틀에 걸쳐 닦고 말리기를 반복했다. 냉장고도 끄집어내어 먼지 청소도 했다. 그간 미뤘던 냉장고 청소를 이렇게 하게 되는구나. 그간에 쌓인 먼지들을 보고 있자니 고장이 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고장의 원인은 '나' 아니었을까?


다른 가전과 달리 냉장고는 고장 나는 순간 먹고사는데 문제가 생긴다. 빨리 처리해야 할 반찬과 식재료로 대충 만들다 보니 삼일동안 식탁이 간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박한 식사가 나쁘지 않았다. 한 끼 식사에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오늘 드디어 A/S를 받아 컴프레서를 교체하니 다시 냉장고에 냉기가 돌기 시작한다. 실외기실에 옮겼던 내용물들을 다시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빈 공간을 다시 채우는 시간. 한바탕 비워냈기에 냉장고에 자리가 반이 남는다. 이제야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여유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부디 냉장고와 내 맘의 여유가 오래 지속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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