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도시 이면에서 마주한 신앙의 얼굴
대성당의 그늘 아래, 낮은 곳으로 향하는 계단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이한 첫 번째 주일 아침은, 대륙을 가로질러 달려온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의 시간이었다.
긴 여정 끝에 맞는 주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우리는 이 화려한 도시의 이면, 관광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 어딘가에 자리한 우즈베크인 교회를 찾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한때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된 상태다. 복음의 문은 닫힌 듯 보였고, 사역의 터전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수많은 우즈베키스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흩어진 사람들이 또 다른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YCH 선교사님은 2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한복판에 우즈베키스탄인 교회를 개척하셨다. 닫힌 땅에서가 아니라,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찾은 셈이었다. 추방으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전혀 다른 도시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지상에는 대리석으로 치장된 정교회 성당들이 제정 러시아의 영광을 뽐내며 웅장하게 서 있었지만, 우리가 발을 들인 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이, 권위 대신 절실함이, 장엄한 돔 대신 사람들의 숨결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건물의 어둡고 낡은 지하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야 마주한 작은 예배당은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기까지 했으나, 그곳을 채운 영적 열기는 지상의 그 어떤 대성당보다 뜨겁고 강렬했다.
언어의 장벽을 허문 우즈베크 인들의 뜨거운 절규
예배당 안에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건너와 러시아의 거친 삶을 견디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힘겨운 노동과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예배가 시작되자 그들의 얼굴에서는 고단한 삶의 흔적 대신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환희가 피어올랐다. 우즈베크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인 찬양은 우리에게 낯선 선율이었지만, 그 간절한 목소리와 하늘을 향해 뻗은 손길은 언어의 장벽을 단숨에 허물어뜨렸다.
그들의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생존의 최전선에서 올리는 가장 뜨거운 고백이자 절규였다. 예배 도중 우리는 한국어로, 그들은 러시아어와 우즈베크어로 찬양했지만 서로의 영이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었다.
낡은 목재 의자에 앉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도하며, 나는 지난 여정 동안 쌓였던 육체적 피로와 영적인 갈급함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화려한 황금 돔의 위엄보다 더 빛나는 것은 척박한 지하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신앙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따뜻한 체온이었다.
국경을 넘은 환대, 그리고 배추김치가 전한 위로
예배 후 이어진 소박한 애찬의 시간은 국적과 언어를 초월하여 우리가 하나의 가족임을 확인시켜 주는 축제와 같았다. 낯선 이방인인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환대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오후에는 우리가 머물고 있던 미르 선교센터로 돌아와 선교센터 식구들과 함께 귀한 교제를 이어갔다. 모스크바에서 정성껏 담가온 배추김치는 낯선 타지 생활에 지친 선교사님 가정에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일전에 이르쿠츠크의 겨자씨교회 선교사님 가정을 위해서도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가드렸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더 뭉클했다. 빨갛게 잘 익은 김치를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선교지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와 그들이 겪는 치열한 삶의 고민들을 경청했다.
에벤에셀의 휴식과 보이지 않는 손길의 인도
선교센터 마당 한구석에 세워진 에벤에셀은 잠시 엔진을 식히며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실어 나른 에벤에셀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듯했다.
여정의 초반부에 하바롭스크를 향하며 겪었던 천둥번개와 인터넷도 터지지 않던 고립된 밤들, 그리고 예카테린부르크를 지나며 마주했던 수많은 이정표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 주일은 그렇게 지하 예배당의 깊은 감동과 선교센터에서의 따뜻한 나눔으로 가득 채워졌다. 지지 않는 백야의 빛이 밤늦도록 창가를 서성이는 동안, 우리는 이 모든 여정이 우리의 계획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밀한 손길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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