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의 묘기와 쪙의 한마디, 그리고 운하가 건넨 선물
박물관 속을 유영하는 아슬아슬한 곡예
미르 선교센터의 고요를 뒤로하고, 에벤에셀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심장부를 향해 육중한 몸을 틀었다. 이제 문제는 거리가 아니었다. 정교한 감각의 싸움이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석조 건물들, 그 사이를 가늘게 흐르는 그리보예도프 운하. 그 풍경 속에서 에벤에셀은 거대한 박물관 전시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낯선 방문객처럼 어색했다.
운하 옆 좁은 길로 접어들 때마다 차체와 벽면 사이의 간격은 숨이 막힐 만큼 가까워졌다. 핸들을 움켜쥔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그 긴장마저도 이 도시가 건네는 통과 의례처럼 느껴졌다.
밀리미터 단위로 차를 움직일 때마다 쪙은 숨을 죽인 채 창밖을 살폈다. 우리는 말없이 호흡을 맞췄다.
마치 하나의 몸처럼, 고대 도시의 좁은 혈관을 천천히 통과했다.
주차의 달인 뾰님, 훈장보다 값진 인정
마침내 바늘귀 같은 공간에 에벤에셀을 밀어 넣고 시동을 끄는 순간, 팽팽하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와, 진짜 주차의 달인이다 뾰님!”
그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심이 듬뿍 담긴 한마디는 예상보다 훨씬 깊게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륙을 건너오며 켜켜이 쌓였던 50일간의 피로가 그 말 한마디에 봄눈 녹듯 사라졌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건네는 인정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훈장보다 묵직하고 따뜻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칭찬은 고래뿐만 아니라, 거친 대륙을 달려온 횡단자의 멈춰가던 심장도 다시 뛰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좁은 차 안에서 그 안도감을 함께 나누며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맨발의 소동과 사라진 신발 한 짝
하지만 감동의 여운도 잠시, 산책을 나서려는 순간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쩡이의 신발 한 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까 분명히 차 안에 두었던 것 같은데, 좁은 차 안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도심 주차를 하며 느꼈던 그 숨 막히던 긴장은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한쪽 발이 맨발인 채로 당황해하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좁은 에벤에셀 안에서 짐을 다 들어내며 소동을 피웠지만 신발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쩡이는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다른 갈색 신발을 꺼내 신고서야 겨우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거대한 도시는 우리에게 장엄한 풍경뿐만 아니라, 이렇게 삶의 작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소한 웃음들을 선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선물한 보랏빛 쉼표
에벤에셀을 정박해두고 나서야 비로소 도시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 걷는 길.
잔잔한 물결 위를 오가는 작은 배들, 노을빛을 머금은 석조 건물들.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걸음을 늦추며 받아들였다.
돌아온 신발, 여행이 건네는 다정한 장난
산책을 마치고 선교센터로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토록 찾던 신발 한 짝이 선교센터 마당에 세워둔 다른 차량 밑에 얌전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먼지 하나 묻지 않고,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채로 말이다. 아마 차 문을 열 때 쪙도 모르게 밖으로 떨어졌던 모양이다.
쪙은 새 신발을 살 계획이 무산됐다며 아쉬운 듯 투덜댔지만, 오래 신어 발에 익은 편안함을 되찾은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번졌다. 여행은 이렇게 사소한 장난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또 다정하게 돌려보냈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 새겨진 쉼표
밤 11시가 넘어도 하늘은 어둠을 허락하지 않았다.
백야. 해는 지평선 부근을 서성이며 도시를 옅은 보랏빛으로 감싸 안았다.
에벤에셀의 먼지는 씻겨 나가고, 그 자리에 도시의 야경과 아내의 칭찬, 그리고 잃어버린 신발이 남긴 웃음이 차곡차곡 쌓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첫 도심 탐방은 우리에게 하나의 쉼표가 되었다. 쉼표는 멈춤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위해 숨을 고르는 자리.
우리는 지지 않는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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