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네바 강변의 버스킹과 무음 영화가 된 연대

기록된 정적 속에 흐르는 유라시아 횡단자의 뜨거운 숨결

by 편부효

네바 강변에 울려 퍼진 에벤에셀의 선율


대륙의 끝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시간을 증명하듯 하늘은 유독 맑고 높았다. 우리는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곶으로 향했다. 네바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그곳에는 과거 배들의 길잡이였던 웅장한 로스트랄 등대가 서 있었다.

상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다는 Rostral'naya Kolonna


붉은색의 거대한 기둥 아래쪽에는 네 개의 조각상이 앉아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4대 강인 볼가강, 드네프르강, 네바강, 볼호프강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붉은 기둥이 솟아오른 등대는 이 도시가 견뎌온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에벤에셀의 문을 열고 조심스레 악기를 꺼냈다.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우리를 위로했던 선율들을, 이제는 예술의 심장인 상트의 강물 위로 띄워 보낼 시간이었다.


쪙은 목을 가다듬었고, 나는 기타 줄을 튕기며 강바람에 음을 실었다. 한쪽 스피커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소리는 조금 거칠고 투박했지만, 우리의 연주는 네바 강변의 맑은 공기를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네바강변의 로스트랄 등대 앞에서 버스킹 중인 뾰와 쪙


그때 자주색 티셔츠를 입은 한 현지인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마치 세기의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도 된 양 진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다각도에서 우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비록 완벽한 음향은 아니었지만, 에벤에셀이라는 든든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음악가였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훌륭한 공연가였다.

갑자기 몰려든 열성 팬(?)들과 기념촬영


무음 영화가 되어버린 뜨거운 연대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영상을 확인했을 때,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셀카봉 마이크 설정 오류로 소리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무음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간절했던 노래도, 기타 선율도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고요한 영상 속에 담긴 자주색 티셔츠 사내의 열정적인 몸짓과 우리의 환한 웃음은 소리가 있을 때보다 더 진하게 다가왔다.


소리는 사라졌어도 언어와 국적을 초월한 음악의 연대를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상트의 강물은 분명 우리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에, 무음 영화면 어떠랴 싶었다.


소리가 없었기에 오히려 그날의 세찬 바람 소리와 쩡의 행복한 표정이 더 선명하게 마음의 눈을 파고들었다. 진심은 소리 없이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먹통이 된 영상 속에서 역설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표토르 1세가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그리보예도프 운하


카잔 대성당, 거대한 역사의 숨결 속으로


다음 날 우리는 넵스키 대로의 중심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신적 지주인 카잔 대성당으로 향했다. 거대한 반원형 회랑 앞에 섰을 때, 94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곡선은 우리를 그대로 멈춰 서게 했다. 성당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카잔 대성당과 그 앞에 우뚝 솟은 스몰렌스크 쿠투조프 동상


성당 앞에는 프랑스 침공 당시 모스크바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으로 끝내 승리를 이끈 러시아의 영웅, 쿠투조프 장군의 동상이 위엄 있게 광장을 굽어보고 서 있었다.


그 거대한 역사적 자취와 강인한 러시아의 정신 곁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수백 년 전 전쟁의 포화를 견뎌낸 이곳에 우리 부부가 서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꼬마 숙녀의 미소와 엄숙한 기도의 향기


성당 입구에 다다르자 성당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양 소리가 광장의 소음을 덮으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마 곁을 지키며 앞줄에 똑바로 서 있는 꼬마 숙녀의 귀여운 모습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하는 러시아인들의 엄숙한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 화려한 도시가 지닌 깊은 신앙의 무게와 삶의 고뇌를 체감했다.


화려한 금빛 장식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였다.

성당 내부의 화려한 제단과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의 모습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 사이에서 외부인인 우리가 신기한 듯 카메라 셔터를 찰칵거리며 사진을 찍는 것이 미안해져, 우리는 서둘러 조용히 성당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맑았던 하늘이 어느덧 흐려지며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우리의 안식처인 에벤에셀 안으로 돌아왔다. 빗소리가 지붕을 때리는 차 안에서 허기를 달래려 장라면을 끓였다. 좁은 차 안 가득 라면 냄새가 퍼지고, 비 내리는 상트의 차가운 거리에서 먹는 뜨거운 라면 한 그릇은 그 어떤 귀족의 만찬보다 훌륭하고 따뜻했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 새겨진 소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는 여전히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도시를 신비로운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지지 않는 태양처럼 우리의 여정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계속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해 보았다.


낯선 도심에서의 긴장과 음악이 준 연대, 그리고 성당에서의 경건함이 한데 섞여 그렇게 깊어갔다.


에벤에셀은 빗물에 몸을 씻으며 내일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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