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라는 문턱 앞에서 마주한 예기치 못한 파도
정성 어린 식탁, 기도로 연 아침
오전 7시, 고요한 새벽기도를 마치고 선교센터 식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았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음식들이 차려진 그곳엔 국경과 교파를 초월한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기까지, 억척스럽게 달려온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척박한 땅에서 25년 넘게 묵묵히 헌신해 온 선교사님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이정표였다.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가는 그들의 겸손한 삶을 마주하며, 나 역시 이 긴 여정의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기를 조용히 읊조렸다.
보험료 4배 인상, 예고 없이 찾아온 먹구름
평온한 아침도 잠시, 현실의 파도가 발목을 잡는다.
유럽 입성을 위한 필수 관문인 차량 점검과 자동차 보험인 그린카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숙제를 풀지 못하면 유럽 땅은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신기루일 뿐이다. 우리는 핀란드를 시작으로 한 달간의 유럽 일정을 빼곡히 그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불과 열흘 전 국경을 넘은 지인에 따르면, 보험료가 작년보다 무려 4배나 폭등했다는 것이다.
한정된 예산으로 길 위의 삶을 이어가는 우리에겐 가혹한 시련이었다. 라트비아로 우회할까, 아니면 여기서 6시간을 더 달려 정면 돌파를 할까.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경우의 수들로 가득 찼다.
그때 아내 쪙의 집념 어린 검색 끝에 함부르크의 국제 보험사 한 곳을 찾아냈다. 인상된 가격보다 훨씬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서둘러 메일을 보내니 청약서를 작성해 이메일로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덩치 큰 에벤에셀을 거절하는 세상
보험의 실마리를 찾았으니 이제 차를 돌볼 차례였다. 하지만 정비소 찾기는 보험보다 더 험난했다.
캠핑카로 개조한 우리 에벤에셀의 듬직한 덩치가 문제였다. 정비소 직원들은 차를 보자마자 대형차는 감당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의 서비스 센터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돌아오는 건 차갑게 닫힌 문 뿐이었다.
계획이 어긋날수록 마음은 조급해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멈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세르게이 전도사님이 백방으로 길을 찾는 동안, 우리는 피아노와 기타를 꺼내 들었다.
불안한 마음을 찬양 속에 실어 보내니, 비로소 날 선 긴장이 조금씩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희망 고문의 끝, 그리고 실소 섞인 해프닝
마침내 함부르크에서 기다리던 이메일이 도착했다.
그러나 희망은 찰나였다. 8년 넘은 노후 차량, 65세 이상 운전자, 그리고 버스 개조 캠핑카.
그들이 제시한 거절 사유중 2개는 통과했지만 마지막 조건을 통과하지 못했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려 마트 Lenta로 향했다. 좋아하는 동태와 삼겹살을 카트에 담으며 소소한 위안을 찾았다.
친절한 직원이 만들어준 할인카드 덕분에 기분 전환도 잠시, 저녁 식사 후 휴지를 정리하다가 또 한 번 무너졌다. 아내 쪙이 휴지인 줄 알고 산 뭉치가 알고 보니 키친타월 32 롤이었다.
다시 마트로 가서 환불을 받고 돌아오는 길,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되는 일 하나 없는 하루였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정박지에 차를 세우니 쪙과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다시 안도감이 찾아온다.
빗속의 정원, 수채화가 된 궁전
이튿날 아침, 어제의 피로를 털어내고 새로운 숨을 불어넣기 위해 상트의 보석이라 불리는 여름궁전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비가 내려 관광객이 뜸한 매표소에 닿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한적한 옆문으로 들어선 덕에 줄을 서는 수고도 덜었다.
입장료 900 루블이 다소 비싸게 느껴졌지만, 문을 열고 마주한 풍경은 그 숫자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정원이었다.
화려함의 극치였던 예카테리나 궁전을 보고 온 뒤라 처음엔 그저 담백한 공원처럼 보였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숨겨진 매력이 하나둘 고개를 든다.
정원 곳곳에서 춤을 추듯 뿜어져 나오는 분수들은 이 거대한 궁전을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수많은 동상들이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 이라니 어마어마하다.
특히 체크무늬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와 황금빛 동상들의 조화는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정원 끝자락, 해안가에 서자 저 멀리 바다 너머로 핀란드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저 바다를 건너 유럽의 심장부로 들어설 우리 부부의 모습을 그리며 다시금 횡단의 의지를 매만졌다.
비록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벤치에 앉아 나눠 먹은 소박한 간식 하나에 마음만은 다시 화창해졌다. 분수 터널을 지나며 물줄기를 맞고 아이처럼 웃는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어제의 시름도, 내일의 걱정도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여름궁전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지나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푸틴 대통령의 별장을 발견했다.
시련과 행운이 촘촘히 엮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시간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멈추고 돌아가야 했지만, 그 또한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긴 호흡의 일부임을 안다.
흐린 날의 끝에서 만나는 맑은 공기가 더 달콤하듯, 우리의 모험은 이 불확실함 때문에 더욱 빛나고 있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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