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낡은 신발과 두 손, 탕자의 귀향

에르미타주, 거장의 품에서 찾은 길 위의 안식

by 편부효

인류의 보물창고, 700루블의 황홀경


어제의 비는 그쳤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보험과 차량 수리라는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던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잠시 뒤로하고 우리는 인류의 보물창고라 불리는 에르미타주로 향했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네바강의 도도한 흐름과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겨울궁전의 민트색 외관은 어제의 고단함을 한순간에 잊게 할 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 박물관


우리는 700루블의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 티켓과 층별 안내도를 손에 쥐었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박물관 입구부터 쏟아지는 인파와 압도적인 층별 안내도는 이곳이 얼마나 거대한 예술의 미로인지 짐작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제정 러시아의 영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작품 전시 구역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요르단 계단을 오르며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천장의 벽화와 정교한 조각들, 발걸음마다 느껴지는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은 인간의 예술적 집념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박물관은 모든 방마다 천정과 바닥이 모두 다르게 꾸며져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3M 가까운 거대한 초록빛 말라카이트 화병 앞에서 뾰쪙은 압도적인 크기와 화려한 무늬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에르미타주의 말라카이트 화병과 말라카이트 로툰다


쪙과 나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이 거대한 아름다움 속으로 기꺼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보험 걱정, 차 수리 걱정은 이 황홀한 공간 안에서 잠시 먼지처럼 흩어졌다.


거장들의 숨결과 빛의 소용돌이


박물관의 깊숙한 내부로 들어갈수록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다윗과 요나단>과 <에서와 야곱>


리타 마돈나 앞에 섰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성모의 자애로운 미소와 아기 예수의 평온한 눈빛은 길 위에서 지친 우리 부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예수님과 마리아 <Madonna and Child (The Litta Madonna)>


라파엘로 코리도어의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들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 성화 속 인물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맞추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은 평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브라함의 희생(이삭의제사)과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우리는 또한 8시에 작동한다는 황금 공작 시계를 보기 위해 파빌리온 홀에서 기꺼이 기다림을 선택했다.


수많은 인파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시계의 태엽이 감기고 황금 공작이 천천히 날개를 펴며 장관을 연출했다.

파빌리온 홀에있는 황금 공작 시계


쪙은 옆에서 아이처럼 기뻐하며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 모든 화려한 사치 너머, 우리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박물관의 가장 깊숙한 안쪽, 렘브란트의 방이었다.


탕자의 발뒤꿈치에서 나를 보다


그곳에서 마주한 <돌아온 탕자>.


주변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캔버스 속 노부와 남루한 아들만이 은은한 빛 속에 떠올랐다.


내 시선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은 것은 아버지를 향해 꿇어앉은 아들의 '발'이었다. 얼마나 험한 길을 걸어왔는지 다 닳아 빠져 발가락이 삐져나온 신발, 그리고 시커먼 때와 상처로 뒤덮인 발뒤꿈치.


그 발은 지난 60일간 시베리아의 벌판을 건너온 나의 발이었고, 우리의 발이었다.


대륙 횡단이라는 거창한 목표 아래 에벤에셀을 몰고 달려왔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불안과 실수들이 저 탕자의 누더기처럼 부끄럽게 떠올랐다.


그때 내 곁을 지키던 쪙이 가만히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림 속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을 가리키는 손길이었다.


"여보, 저 손 좀 봐요. 한 손은 투박한 남자의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에요."


쪙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두 손은 길 잃은 여행자를 품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포용이었다.

우리 역시 그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배려에 의지해 이 거친 대륙을 건너왔음을 직감했다.


방랑의 쉼표, 그리고 가벼워진 마음


에르미타주의 보물들이 박제된 과거의 영광이라면, 렘브란트가 그린 저 지저분한 발과 따뜻한 두 손은 지금 우리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인생의 격려였다.


쪙은 이 그림 앞에 한참 동안 머물며 마음을 쏟아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이 지금 이 그림에서 느껴져요."


쪙의 고백은 우리 부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초라한 모습까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과정임을 이 그림 한 점이 말해주고 있었다.


화려한 궁전 광장을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는 여전히 환했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평온이 깃들었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어진 긴 방랑이 이 그림 한 점으로 잠시 쉼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알레산드르 원주 앞에선 뾰와 쪙

이제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새로운 국경을 향해 에벤에셀의 시동을 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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