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거룩한 정거장에서 마주한 생존의 기록

낡은 엔진을 깨우고 사선을 넘은 형제들을 맞잡다

by 편부효

기적의 시작, 현대차 서비스센터를 찾아서


에르미타주의 예술적 감동도 잠시, 현실의 문제는 여전히 에벤에셀의 엔진 소리만큼이나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러시아 횡단으로 14,000km 이상을 달려온 에벤에셀은 정밀 점검이 절실했다. 하지만 시내 정비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를 외면했고, 낯선 이국 땅에서 도움의 손길은 멀기만 했다.


그때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분이 세르게이 전도사님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어렵게 도시 외곽의 현대차 Truck & Bus 서비스센터를 찾을 수 있었다.


오후 1시 방문을 예약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유럽의 높은 물가에 대비해 Lenta 마트에서 대대적인 장보기에 나섰다.


부탄가스부터 배추, 오이, 쪽파까지 카트 두 개를 가득 채우며 다음 여정을 위한 채비를 마쳤다.


쪙의 뚝심과 엔진오일 교환의 안도감


하지만 마침내 도착한 센터의 반응은 차가웠다. 예약이 밀려 9일 후에나 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절망적인 순간, 우리 집 안주인 쪙의 무서운 뚝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겠다!"며 창구에 앉아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매니저가 나와 커피까지 대접하며 쪙을 달래더니, 여기저기 뛰어다닌 끝에 토요일 오전 9시 예약이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한국 아줌마의 강단이 러시아 땅에서도 통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이 나는 근처 다른 정비소에서 급한 대로 엔진오일 14리터를 교환했다. 4,780 루블이라는 거금을 들였지만, 새 오일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에벤에셀이 숨을 쉬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요소수까지 넉넉히 채우고 나니 유럽으로 나갈 물리적인 준비가 하나둘 갖춰지는 기분이었다.


10분의 기적, 그리고 그린카드 해결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정의 가장 큰 고비는 그린카드(유럽 자동차 보험) 해결이었다.


2주 넘게 백방으로 알아봐도 해결되지 않던 보험 문제가,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찾아간 곳에서 단 10분 만에 해결되었다.


단돈 4,800 루블에 손에 쥔 보험 서류 한 장.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유럽으로 향하는 자유 이용권이자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증표였다.


기계 장치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 여정을 촘촘히 인도하고 계심을 확신했다. 불안했던 마음은 어느새 깊은 평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룩한 정거장, 목숨을 건 형제들을 만나다


우리의 안식처였던 미르선교센터는 단순한 숙소가 아닌 거룩한 정거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은 탈북 형제들과 마주 앉았다.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대륙을 가로질렀지만, 이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생사를 걸고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고향에서 먹던 얼큰한 라면 한 그릇과 따뜻한 쌀밥 한 끼가 가장 그립다는 그들의 소박한 말 한마디는,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던 평범한 맛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투쟁 끝에 닿고 싶은 간절한 소망임을 아프게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에벤에셀에서 기타를 꺼내와 그들과 함께 찬양가를 불렀다. 헤어지며 맞잡은 그들의 거친 손에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체온을 보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이들의 생존 투쟁 앞에서 차체의 작은 찌그러짐에 전전긍긍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사소하고 배부른 고민이었는지 깨달았다.


사람보다 귀한 예술은 없고, 자유보다 눈부신 풍경은 없다. 상트의 백야는 이제 궁전의 화려함이 아닌, 사선을 넘은 이들의 굳센 의지를 비추고 있었다.


여호와 이레의 손길 아래서


탈북 형제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쿠데타로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난민이 된 보르구 까지. 낯선 땅에서 신앙으로 하나 된 이들의 모습은 우리 여정이 단순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과정임을 가르쳐주었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해 주신 미르선교센터의 식구들 덕분에 우리는 영육의 허기를 채우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기적을 예비하시는 하나님과, 따뜻한 동역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다시 달린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여호와 이레의 손길이 함께하고 있다. 이제 에벤에셀의 시동을 다시 건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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