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속 묵상과 교과서 밖 거장을 만나다
한국어 가이드 없는 고요함 속, 나만의 그림을 만나다
에르미타주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우리는 러시아 예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는 러시아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미 입구의 푸쉬킨 동상에서 느꼈던 설렘은 웅장한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더욱 깊어졌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정교한 천장 장식들은 이곳이 담고 있을 예술의 깊이를 짐작게 했다.
캔버스에 새겨진 시간, 러시아 역사의 무게를 읽다
아쉽게도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감사했다.
어떤 설명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그림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관광객들에게 밀려다니지 않고,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충분히 머물며 작품과 대화할 수 있는 여유가 이곳엔 있었다.
전시실 곳곳에 가득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조각상과 거대한 초대형 이콘들은 러시아 역사의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호화로운 귀족들의 모습부터 자연의 웅장함, 전쟁의 아픔, 서민들의 고단한 삶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그림들 속에서 우리는 러시아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교과서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자매의 초상화는 우리를 미소 짓게 했고, 70대의 고령에 알프스를 넘었다는 스보릅스키의 용기에 압도되기도 했다.
성화 속 묵상, 그림이 말을 걸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잡은 것은 성서의 내용을 담은 거대한 성화들이었다.
놋뱀과 불뱀 앞에 섰을 때, 쪙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데! 라며 믿음의 단순함을 고백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 위의 놋뱀을 보면 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인생의 고난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함을 묵상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 현장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 최후의 만찬 속 유다의 모습을 보며 긴장감을 느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부활 후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모습 앞에서는 가슴 뭉클한 소망을 얻었다.
사자 밥이 되는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이 모든 성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교과서 밖 거장을 만나다, 제9파도의 생동감
성화의 감동을 뒤로하고, 우리는 또 다른 거장 아이바조프스키의 방을 찾았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의 대표작 제9파도 앞에 섰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아이바조프스키가 실제 거대한 파도 속에서 살아남은 후 그려냈다는 이 작품은, 진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수없이 다가오는 집채만 한 인생의 파도 속에서 조각배에 의지해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
쪙은 수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파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오직 주님이라며 그림 속에서 발견한 신앙의 진리를 고백했다. 교과서 속 그림이 살아있는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에르미타주를 넘어선 러시아의 혼
에르미타주가 전 세계의 아름다움을 모아놓은 호화로운 궁전이라면, 러시아 미술관은 러시아 사람들의 진솔한 삶과 영혼이 담긴 묵직한 공간이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레핀의 작품들은 모스크바로 옮겨져 볼 수 없었지만 귀국길에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6시 마감 시간까지 가득 채워 관람한 우리는 다시 미르선교센터로 향했다.
러시아 사람들의 자유롭고 예술을 사랑하는 버스킹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며 저녁 7시 기도회에 참석했다.
선교사님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금 묵상했고, 주님 닮은 제자의 길을 가리라 다짐하며 찬양을 올렸다.
고려인 교회 전도사님께서는 거장들의 모습이 담긴 소중한 선물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석을 선물해 주셨다.
또 한인 교회 김 사모님께서는 여행 중에 먹으라며 양배추 김치를 한 통이나 담가주셨고 쪙 역시 YCH선교사님께 아침에 담근 배추김치를 드리며 작은 나눔의 기쁨을 누렸다.
거장들의 숨결과 따뜻한 선교사님들의 사랑으로 가득 찼던 러시아 미술관에서의 시간은 우리 여정에 잊지 못할 가장 깊고 진한 예술적 쉼표이자 신앙의 회복을 안겨준 시간이 되었다.
추신.
그동안 저의 러시아 여행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에벤에셀의 러시아 대장정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럽 편 연재를 준비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제가 다른 매거진에서 연재 중인 <태어난 속도와 살아야 할 박자> 이야기를 통해 계속 소통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여행의 역동적인 기록과는 또 다른, 우리 삶의 깊은 호흡에 관한 고민들을 담았습니다. 함께 나누어 주신다면 저에게 큰 힘이 되겠습니다.
매거진 태어난 속도와 살아야 할 박자 바로가기
https://brunch.co.kr/magazine/speed-and-beat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유라시아횡단 #러시아캠핑카여행 #부부세계일주
#캠핑카세계여행 #시베리아횡단 #은퇴후세계여행
#인생2막 #은퇴후도전 #지구촌여행기 #에벤에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