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의 베네치아가 건넨 강렬한 인사
대륙을 가로질러 마주한 도시의 실루엣
예카테리나 정원의 평화로운 초록빛을 뒤로하고 에벤에셀은 다시 서쪽을 향해 바퀴를 굴렸다. 나는 습관처럼 계기판을 확인했다.
13,480km.
동해항에서 3,680km의 무게를 품고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던 에벤에셀. 그날 이후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정확히 9,800km를 더 달린 셈이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자락까지, 계기판의 숫자는 단순했으나 그 이면에는 자작나무 숲의 깊은 침묵과 우랄산맥의 거친 능선, 그리고 끝없는 도로 위에서 쏟아냈던 기도와 긴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계에 들어섰다.
축제의 열기와 낯선 위압감
그러나 도시의 첫인상은 환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충돌에 가까웠다. 도심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광장은 인파로 가득 찼고,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비트와 함성이 차창을 넘어 에벤에셀 내부까지 밀려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마침 ‘화이트 나이트 페스티벌(White Nights Festival)’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시베리아의 정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이 도시는 지나치게 뜨겁고 소란스러웠다.
평소라면 우아한 자태를 뽐냈을 ‘북방의 베네치아’는 오늘만큼은 젊음의 열기로 들끓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보였다.
그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낯선 위압감이 우리를 압도했다.
멈춰버린 기술, 깨어난 감각
도로는 이미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러시아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얀덱스(Yandex)와 구글 지도는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며 충돌했다.
경찰 통제로 막혀버린 도로를 인지하지 못한 채,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우리를 폐쇄 구간의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첨단 기술이 무용지물이 된 자리에서 우리는 결국 날 선 아날로그적 감각을 깨워야 했다. 표지판을 읽고 건물의 방향을 가늠하며 직감으로 핸들을 돌렸다.
대륙을 횡단한 거창한 여정의 마침표는 결국 기계가 아닌 사람의 감각으로 찍히고 있었다.
운하 옆 좁은 길, 공포와 경이 사이
폭이 좁은 운하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의도치 않은 강제 시티투어가 시작되었다. 에벤에셀의 덩치로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비좁은 길이었다.
핸들을 조금만 잘못 꺾어도 운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고, 수백 년 된 석조 건물의 벽면을 긁지는 않을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 공포의 한복판에서 마주한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황금빛 조명이 운하 위에서 잘게 일렁이고, 고풍스러운 건물의 그림자가 수면에 겹쳐지는 순간, 나는 이곳이 왜 ‘북방의 베네치아’라 불리는지 온몸으로 이해했다.
공포와 경이는 이 도시에서 늘 한 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안식의 처소, 미르 선교센터
축제의 소음과 긴장된 사투를 뚫고 우리는 마침내 미르 선교센터 마당에 에벤에셀을 세웠다.
엔진을 끄는 순간, 차와 우리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깊은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9,800km를 달려오며 켜켜이 쌓인 먼지가 도시의 불빛 아래서 천천히 식어갔다.
우리가 예정보다 하루 일찍 이곳에 도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주일을 온전히 준비하며 이 도시가 품은 영성과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르 선교회 — 연합이라는 기적
미르 선교센터의 시작은 YCH선교사님이 개척한 작은 고려인 교회였다. 그 불씨를 이어받아 다섯 분의 선교사님들이 마음을 모아 건물을 마련하고 구호센터로 등록해서 함께 사역하고 있다.
‘미르(Mir)’라는 이름은 참 묘하다. 러시아어로 ‘세계’와 ‘평화’, 그리고 ‘샬롬’이라는 깊은 뜻을 품고 있는 동시에, ‘러시아 예수 선교회( Миссия Иисус Россия)'의 약자이기도 하다. 이름 하나에 이곳이 가야 할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이곳은 상트 지역 세 곳의 고려인 교회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신학교와 한글학교를 통해 사람을 키우고, 구제 사역으로 이웃을 돌본다. 주일이면 아침 9시 러시아인 예배를 시작으로, 11시 한인 유학생 예배, 오후 2시 30분 고려인 예배가 쉴 틈 없이 이어진다.
미르의 진짜 힘은 1996년 5월부터 시작된 ‘연합’에서 나온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라는 교단의 벽을 허물고 오직 복음을 위해 손을 맞잡은 팀 사역. 그 출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간증이었고, 미르는 이제 단순한 단체를 넘어 러시아 교회의 뿌리를 내리는 거대한 숲이 되어가고 있었다.
• 목회자 양성: 신학교 운영을 통한 체계적인 교육
• 지속케어: 현지 목회자 재교육 세미나 및 제자 훈련
• 구조적 선교: 자립 가능한 건강한 교회 구조 구축
• 자립과 이양: 한인 및 고려인교회 개척 후
현지인에게 교회 이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제국의 화려한 잔상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세워가고 있었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 새겨진 소망
밤 11시가 넘었음에도 하늘은 완전히 어둠을 허락하지 않았다. 백야였다. 유럽의 세련된 정취와 러시아 특유의 웅장함, 그리고 그 땅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 한 도시 안에서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덧 러시아의 서쪽 끝자락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지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였다.
소란스러웠으나 강렬했고, 위압적이었으나 환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지 않는 태양 아래에서 에벤에셀의 먼지는 조용히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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