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천 년의 세월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만난 역사의 시작과 황제의 정원

by 편부효

러시아 역사의 첫 페이지를 넘기다


노브고로드의 아침은 전날의 폭우가 무색하리만큼 맑게 갰다. 우리는 에벤에셀의 시동을 걸어 러시아 역사의 발원지라 불리는 벨리키 노브고로드 크렘린으로 향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제국의 뿌리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노브고로드 크렘린의 붉은 성벽 안으로 발을 들이자, 천 년의 세월이 묵직하게 우리를 덮어왔다. 성벽 내부의 공기는 대도시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노브고로드 크렘린의 붉은 성벽과 1년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


기념비에 새겨진 천 년의 숨결과 영원한 불꽃


가장 먼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129명의 위인이 정교하게 새겨진 러시아 천년 기념비였다.

1862년 러시아 건국 천 년을 기념해 세워진 이 거대한 종 모양의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았다.


루리크 왕조의 시작부터 표트르 대제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지탱해 온 인물들이 금속의 질감 속에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러시아 천년 기념비(Millennium of Russia) 전체 모습


그 옆에서 1년 365일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영원한 불꽃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기리는 산 자들의 경건한 약속이었다. 마침 불꽃 앞에 정중히 헌화하는 신혼부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 고요한 성벽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조용한 울림을 주었다.


천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성곽과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거대한 역사 속의 작은 점임을 실감했다. 모스크바에서 팽팽했던 긴장이 이곳의 느린 공기 속으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크렘린 성벽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볼호프 강가의 오후


화려함 대신 선택한 150 루블의 여유


크렘린을 나선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길가에는 탐스럽게 익은 산딸기들이 붉은 유혹을 건네고 있었고,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도착한 곳은 푸시킨 시의 예카테리나 궁전이었다.


하지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광경은 당혹스러웠다. 매표소 앞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한 궁전 내부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


“여보, 쿨하게 내부 포기하자.”


황제가 거닐던 숲길, 에벤에셀보다 좋은 정원은 없다


저렴한 입장료만 내고 들어선 정원 산책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숲의 숨결이 우리를 맞이했다.


비를 머금어 한결 짙어진 녹음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산책로가 보였다. 호수를 따라 걷다 마주한 카메론 갤러리의 하얀 기둥들은 고풍스러운 자태로 정원의 품격을 더하고 있었고, 마치 신비로운 호수 동굴처럼 낮게 내려앉은 정자, 그로토(Grotto)는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굳이 황금 방을 보지 않아도, 황제가 거닐던 정원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정원을 감상하다 나는 쪙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나중에 이런 집 하나 사줄게.”


내 너스레에 쪙은 웃으며 맞받아쳤다.


“됐어, 매일 아침 150 루블 줄 테니 당신이나 여기서 살아. 난 우리 에벤에셀이 더 좋아.”


정원이 너무 넓어 숨어 있으면 찾지도 못할 거라는 농담 섞인 대화 속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정원 가득 번졌다.


정원을 나가는 길에 만난 푸시킨 동상은 정작 푸시킨 시에 와서 푸시킨을 이제야 봤다는 유쾌한 깨달음을 주었다.

정원을 나가는 길에 마주한 푸시킨 동상

우리는 단돈 몇 루블에 황제의 여유를 샀다. 화려한 궁전 내부의 박제된 화려함보다, 아내와 함께 숲길을 걸으며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이 긴 여정을 지탱하는 진짜 힘임을 다시금 확인한 하루였다.


우리는 넉넉해진 마음을 싣고 다시 에벤에셀의 시동을 걸었다. 이제 목적지는 밤이 없는 백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유라시아횡단 #러시아캠핑카여행 #부부세계일주

#캠핑카세계여행 #시베리아횡단 #은퇴후세계여행

#인생2막 #은퇴후도전 #지구촌여행기 #에벤에셀




이전 21화제19장:거인을 떠나 빗줄기 속에 마주한 천년의 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