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멈추는 것이 여행, 빗물에 씻어낸 대륙의 먼지와 피로
거대 도시의 중압감을 벗어나 마주한 해방감
모스크바라는 거대한 숙제를 끝내고 마주한 것은 시원한 바람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다시 북서쪽을 향해 길 위로 올라섰다.
모스크바는 우리 부부에게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삶의 또 다른 단면을 마주하게 한 묵직한 숙제였다.
살벌한 도로 위에서 에벤에셀과 함께 벌인 생존의 투쟁, 그리고 지친 이방인을 따뜻하게 품어준 선교사님들의 밥상. 여행이라는 이름 아래 경험한 가장 뜨겁고도 차가운 온도가 그 도시에 함께 녹아 있었다.
그 거인의 품을 벗어나는 아침, 핸들을 잡은 내 손목에는 묵직한 여운과 새로운 길을 향한 해방감이 교차했다. 대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다시 광활한 러시아의 숲과 하늘이 열리자, 긴장으로 팽팽했던 가슴속으로 비로소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장막이 가로막은 M11 고속도로의 사투
우리가 선택한 길은 M11 Neva Highway.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참 예뻐서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날씨는 늘 그렇듯 예측하기 어려웠다. 시속 110킬로미터 구간을 시원하게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대형 트럭들이 일으키는 물보라는 순식간에 거대한 하얀 장막이 되어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움직여도 앞차의 후미등조차 희미하게 보일 정도의 폭우였다.
나는 860 루블의 통행료를 지불하며 빗길을 뚫고 나아갔다.
“엉덩이에 욕창 생기겠어.”
장시간 운전에 지친 내가 너스레를 떨자 옆자리의 쪙이 빙긋 웃었다. 나는 다시 묵묵히 핸들을 잡고 에벤에셀을 이끌었다. 농담과 긴장은 늘 그렇게 우리 곁을 함께 달렸다.
비에 젖은 천년 고도, 노브고로드 진입
오후 3시 20분경, 드디어 우리는 러시아의 시작을 알리는 천년의 고도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에 진입했다.
모스크바에서 약 500킬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이곳은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낮은 하늘, 고요한 거리, 느린 숨결. 도시의 표정부터 달랐다.
원래 계획은 도착하자마자 크렘린 내부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속에서의 사투로 몸과 마음은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우리는 무리하게 일정을 강행하기보다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우리만의 베이스캠프, 렌타 마트로 향하다
크렘린 관람은 내일의 맑은 하늘을 기약하며 잠시 뒤로 미루고, 우리의 정박지이자 든든한 안식처인 24시간 렌타(Lenta) 마트로 향했다.
렌타는 우리에게 단순한 쇼핑몰 그 이상의 의미였다. 낯선 땅에서 만나는 가장 익숙한 평화이자, 에벤에셀이 유일하게 긴장을 풀 수 있는 베이스캠프였다.
마트에 주차를 하고 나니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트 한쪽에 마련된 셀프 세차장 뒷마당 세면대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 에벤에셀의 묵은 먼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빗물과 먼지로 뒤덮였던 차체가 다시 본래의 색을 찾아갈 때, 내 마음속의 피로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세수와 머리를 감으며 찌든 운전의 피로를 털어냈다. 비와 세면대 물이 뒤섞인 작은 의식 같았다.
먼지를 씻어내고 마주한 소박한 만찬
장보기를 마친 우리는 차 안으로 돌아와 우리만의 소박한 만찬을 준비했다. 마트에서 산 훈제 닭다리는 오늘 하루 고생한 나에게 주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좁은 에벤에셀 안은 금세 따뜻한 라면 냄새와 온기로 가득 찼다. 도시락 김과 장라면, 그리고 훈제 닭다리로 채워진 식탁은 그 어느 성찬보다 만족스러웠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접어두는 하루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방울이 에벤에셀의 지붕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쪙은 노트북을 열어 밀린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용히 기타 선율을 맞추었다.
비록 모스크바 톨스토이의 집에서 덧신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거장의 흔적을 지나 여기까지 달려온 우리의 발걸음 자체가 하나의 기록임을 깨닫는 밤이었다.
천년 고도의 빗소리는 자장가처럼 잔잔했다. 우리는 그렇게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품 안에서 또 하나의 하루를 접었다.
내일은 맑은 하늘 아래에서, 천 년의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유라시아횡단 #러시아캠핑카여행 #부부세계일주
#캠핑카세계여행 #시베리아횡단 #은퇴후세계여행
#인생2막 #은퇴후도전 #지구촌여행기 #에벤에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