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문명의 퇴장, 지평선이 열어준 고독의 무대
하바롭스크를 지나며 문명은 우리 뒤로 서서히 멀어졌다. 이제부터는 진짜 시베리아의 속살이라 불리는 치타(Chita)를 향한 본격적인 고립의 시작이었다.
길은 끝없는 자작나무 숲과 지평선뿐이었고,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는 수백 킬로미터씩 벌어졌다.
에벤에셀의 바퀴가 구를수록 창밖의 황량함은 깊어졌고, 쪙은 "여보, 정말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아요"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라만의 눈물 젖은 바냐, 대륙이 건넨 뜨거운 첫 번째 위로
우리가 마주한 첫 번째 물부족 사태는 오지 중의 오지인 아마 자르(Amazar) 인근에서 찾아왔다.
며칠째 이어진 노상 차박으로 몸은 흙먼지투성이였고, 에벤에셀의 물탱크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우리는 며칠째 샤워를 못하고 있었다.
먼지와 벌레 사체로 뒤덮인 채 간신히 도착한 아마자르의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맘씨 좋은 러시아 사나이 라만을 만났다.
이방인의 초라한 행색을 본 그는 말없이 우리를 뒷마당의 러시아식 사우나 바냐(Banya)로 안내했다.
그는 우리의 샤워를 위해 무려 1시간 30분 동안이나 직접 장작을 패고 불을 지펴 물을 데웠다. 우리가 에벤에셀의 찌든 먼지를 털어내는 동안, 그는 우리 영혼의 먼지를 씻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궈진 돌 위에 물을 부어 솟구치는 뜨거운 증기 속에서 며칠간 쌓인 시베리아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쪙은 자작나무 가지로 등을 두드리며 “여보,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맛이네요”라며 참았던 눈물을 훔쳤다.
바냐 후에 차려진 뜻밖의 만찬, 라만 가족의 따뜻한 초대
샤워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하려던 우리를 라만은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한다는 우리의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이미 정성스러운 다과와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치즈와 햄, 그리고 그의 아내 마샤가 직접 구운 고소한 빵이 가득했다. 특히 그들이 직접 키우는 닭이 갓 낳은 달걀로 만든 프라이는 그 어떤 진미보다 따뜻했다.
라만은 자신의 두 살짜리 딸이 가장 좋아한다는 사과주스를 우리에게도 추천하며 대륙의 정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라만은 우리 이름이 어렵다며 쪙은 올랴, 뾰는 빠샤라는 친근한 러시아식 애칭으로 부르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내년에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들르기로 약속하며 나눈 그 밤의 대화는, 차가운 시베리아 오지에서 만난 가장 뜨겁고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치타의 의리, 알렉시 아저씨의 샤슬릭이 녹여준 6일의 기다림
그 따뜻했던 라만 가족의 온기를 뒤로하고 도착한 치타(Chita). 우리가 이 낯선 도시에 6일이나 발이 묶인 이유는 단 한 가지, “부상당한 전우(일행)를 모른 채 두고 갈 수 없어서”였다.
함께 달리던 선발대 차량이 고장이 난 것이다. 선발대 사장님은 베테랑 정비사였지만, 러시아 전역을 뒤져도 구할 수 없는 특수 부품의 부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지인 부부가 한국에서 부품을 구하기 위해 공항과 세관을 필사적으로 헤매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든든한 보급 부대가 되었다. 매일같이 직접 물을 길어다 나르고, 좁은 에벤에셀 안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지친 그들의 끼니를 챙겨주었다.
이때 우리 곁을 지켜준 고마운 인연이 현지인 알렉시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사정을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더니, 급기야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당 가득 퍼지는 숯불 향과 함께 잘 익어가는 샤슬릭(러시아식 꼬치구이).
알렉시 아저씨가 건네는 두툼한 고기 한 점에는 언어를 넘어선 깊은 우정이 담겨 있었다. 일행의 차가 고쳐지길 기다리던 불안한 마음은 알렉시 가족과 함께한 샤슬릭 파티의 온기 속에 녹아내렸다. 그 6일은 고립이 아니라, 여행이 가르쳐준 가장 뜨겁고 묵직한 연대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땅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진심을 건너며 진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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