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절체절명의 위기, 멈춰버린 생명의 우물
치타를 떠나 울란우데로 향하는 길, 우리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목욕과 설거지 물이 절실했지만, 간신히 찾아낸 마을의 공용 수동 펌프는 레버가 부러져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을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도 포기한 듯 돌아섰고, 에벤에셀의 물 게이지는 여전히 0을 가리키고 있었다.
7번 아이언의 변신, 맥가이버 뾰의 탄생
절망감이 엄습하던 그때, 뾰는 에벤에셀 뒷자리에 실려 있던 골프채를 떠올렸다.
뾰는 망설임 없이 7번 아이언을 꺼내 들었다.
낡은 펌프의 고장 난 이음새 사이에 골프채를 단단히 끼워 넣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온 체중을 실어 눌렀다.
'끼익— 컥!'
강한 탄성을 이기지 못한 펌프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입구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맑은 지하수!
지켜보던 주민들이 “하라쇼(좋아요)!”를 연발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땀범벅이 된 채 휘어진 골프채를 지팡이 삼아 서 있는 나를 보며 쪙은 환하게 웃었다.
"여보, 나이스 샷이에요!"
골프장에서 공을 치던 도구가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우리의 생명을 잇는 '기적의 지팡이'가 된 순간이었다.
광장의 거인, 울란우데의 거대 레닌 두상을 마주하다
기적적으로 물을 채우고 도착한 바이칼로 향하는 관문,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Ulan-Ude).
우리를 압도한 것은 도시의 공기가 아닌 광장 한복판의 거대한 형상이었다.
높이만 7.7미터, 무게는 무려 42톤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레닌 두상이었다. 몸체 없이 머리만 덩그러니 놓인 그 기묘하고도 거대한 조각상은 마치 대륙의 모든 역사를 꿰뚫어 보는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여보, 저 눈동자가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요."
쪙의 말처럼, 레닌의 무거운 시선은 광장 어디를 가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거인의 응시를 뒤로하고 우리는 사회주의의 거대한 유산이 남긴 차가운 위엄을 빠져나왔다. 이제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태초의 푸름, 바이칼을 향해 에벤에셀의 속도를 높였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동자, 인류의 저수지를 대면하다
울란우데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마침내 지평선 끝에서 믿기지 않는 풍경이 솟아올랐다.
전 세계 얼지 않는 민물의 20%를 혼자 품고 있는 곳, 인류 전체가 40년 동안 마실 수 있는 막대한 물이 고여 있는 ‘지구의 저수지’ 바이칼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심 1,642미터. 남산타워 7개를 수직으로 쌓아 올려야 비로소 바닥에 닿는 그 깊고 어두운 골짜기 위에, 2,500만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이 푸른 액체가 되어 고여 있었다.
에벤에셀의 유리창 너머로 부서지는 햇살은 바이칼의 물결을 따라 수만 개의 보석처럼 빛났다.
40미터 아래 동전의 앞뒷면까지 보일 듯 투명한 그 수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차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 장엄한 정적 속에 잠겼다.
수천 년의 시간을 머금은 그 푸른 물결 앞에서 우리 인생의 여정은 그저 찰나의 물보라처럼 느껴졌다.
태초의 정적 속에서 에벤에셀은 잠시 길을 멈추고 대륙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작나무 연기에 밴 바이칼의 정수, 훈제 오물(Omul)의 유혹
바이칼 해안 도로를 달리다 보면, 코끝을 먼저 낚아채는 것은 자작나무 타는 냄새와 짭조름한 생선 향이다.
길가 곳곳 투박한 나무 가판대 위에는 오직 바이칼에서만 허락된 명물, ‘오물(Omul)’이 황금빛 자태를 뽐내며 줄지어 누워 있었다.
이 신비로운 물고기는 바이칼의 청정함 속에서만 자라는 고귀한 생명체였다.
"오물! 오물!" 환하게 웃으며 생선을 건네는 러시아 아주머니의 투박한 손길에서 대륙의 정을 느꼈다.
신문지에 대충 싸인 뜨끈한 오물의 껍질을 벗기자, 뽀얀 속살 사이로 깊은 훈연의 향이 터져 나왔다.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담백하면서도 기름진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쪙은 "여보, 이건 그냥 생선이 아니라 바이칼 그 자체를 먹는 기분이에요"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2,500만 년의 세월을 간직한 물에서 자라난 생선을 바이칼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뜯어먹던 그 순간, 우리는 화려한 성찬보다 더 깊은 위로를 주는 ‘길 위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자작나무 연기에 밴 그 짭조름한 기억은 바이칼이 우리에게 준 가장 맛있는 훈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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