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999번의 실패와 30초의 허무, 똥손 뾰와 금손 쪙
바이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에벤에셀 내부에서 예기치 못한 '봉쇄령'이 떨어졌다. 갈아입을 옷이 든 캐리어의 다이얼 잠금장치가 제멋대로 돌아가 잠겨버린 것이다.
"비켜봐요, 내 손은 기계손이야. 이런 건 감각이라고!"
나는 호기롭게 소리치며 다이얼 앞에 앉았다. '000'부터 시작된 고독한 행군이었다.
손가락 끝 지문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고, 숫자는 어느덧 300, 500을 지나 999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우주를 한 바퀴 돌린 것 같은 2시간의 사투였지만, 가방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혈압이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옆에서 느긋하게 부대찌개를 비우던 쪙이 무심하게 다가왔다.
'쓱- 달칵.'
허망했다.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2시간의 처절한 사투를 비웃듯 열린 가방 앞에서 나는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쪙의 이 놀라운 '금손'은 단지 잠긴 캐리어를 여는 데만 쓰인 것이 아니었다.
7전 8기, 대륙의 핸들을 잡은 집념의 여인
사실 이 육중한 에벤에셀의 핸들을 잡기까지, 쪙은 한국에서 무려 일곱 번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우리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위해서는 1종 대형 면허가 필수였던 상황에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곱 번의 낙방 끝에, 여덟 번째 도전에서 마침내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었던 그 집념.
그 뜨거웠던 의지가 담긴 손이 지금 시베리아의 거친 바람을 뚫고 지평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캐리어를 여는 섬세한 감각과 대형차를 몰아붙이는 강단 있는 집념.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벤에셀의 진짜 '캡틴'은 운전석에 앉은 내가 아니라, 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온 바로 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쪙의 이 강철 같은 에너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뒤이어 닥칠 '생존의 공포' 앞에서 일찌감치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캐리어 소동 같은 해프닝이 아닌, 에벤에셀의 심장이 멈출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레이스였기 때문이다.
바이칼에서 옴스크까지, 2,500km의 벼랑 끝 레이스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거창한 깃발 아래, 우리의 준비는 결벽에 가까웠다.
천안 집의 도시가스를 끊고, 혹한에 배관이 터질까 보일러 물까지 모조리 빼며 우리는 돌아올 다리를 스스로 불태운 채 길을 떠났다.
그 비장한 각오의 상징이 바로 트렁크에 모셔둔 10리터들이 요소수 두 통이었다. 그것은 나의 가장 확실한 보험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광활한 대지는 그 푸른 액체를 예상보다 빠르게 집어삼켰다. 바이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계기판에 선명하게 들어온 주황색 불빛—요소수 경고등.
그것은 곧 에벤에셀의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노후한 트럭들에게 '애드블루(AdBlue)'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최신 환경 규제를 몸에 두른 에벤에셀에게 이곳은 문명의 혜택이 닿지 않는 거대한 불모지였다. 인터넷도, 전화도 터지지 않는 적막한 산길에서 한 방울의 요소수가 아쉬워질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당장 차가 멈춰 선다면 이 끝없는 숲 속에 고립될 것이라는 공포. 우리는 옴스크에 닿을 때까지 무려 2,500km를,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경고등의 위협 아래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죽음의 레이스를 펼쳐야 했다.
배추 590 루블의 기적, 시베리아를 물들인 고향의 맛
허탈함과 공포를 씻어낸 것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만난 교민들의 온기, 그리고 '김치'였다. 에벤에셀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할 때, 쪙은 시장에서 590 루블을 주고 산 귀한 배추를 말없이 씻었다.
러시아 땅에서 금값이나 다름없는 그 귀한 배추를 앞에 두고, 쪙은 다시 한번 금손을 휘둘렀다. 빨간 고춧가루 양념을 정성껏 버무리는 그녀의 야무진 손끝을 보며 나는 묘한 뭉클함을 느꼈다.
빨간 김치 양념의 익숙한 향기가 퍼지자 비로소 '살아있다'는 감각이 돌아왔다. 자동차의 생명수가 요소수라면, 우리 부부의 생명수는 바로 이 고향의 맛이었다.
완성된 겉절이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방인의 외로움을 견디게 할 '정서적 연료'였다.
알싸한 향기에 이끌려온 여행자들과 접시를 나눌 때, 시베리아 한복판에는 잠시 국경이 사라졌다.
빨간 김치 한 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을 잇는 가교가 되었고, 고독했던 시베리아의 공기는 매콤한 고향의 맛으로 순식간에 달궈졌다.
사투의 종지부, 생명수와의 극적인 재회
결국 옴스크(Omsk)에 입성해서야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20리터의 요소수를 손에 넣었다. 2,500km의 사투 끝에 마주한 그 푸른 액체는 단순한 화학 용액이 아니었다.
에벤에셀의 막힌 숨통을 틔워준 생명수였으며, "포기하지 마라"라고 다독이는 신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시베리아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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