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옴스크의 달콤한 위로, 이방인의 노래
바이칼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달려온 길, 유라시아 대륙은 우리에게 달콤한 당근과 매서운 채찍을 번갈아 내밀었다.
그 첫 번째 선물은 옴스크(Omsk)였다. 무겁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옴스크 기차역 광장.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에벤에셀에서 기타와 건반을 꺼내 들었다.
광장 한복판, 경찰 초소의 시선이 매서웠지만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내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낯선 동양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적막한 광장에 퍼지자, 무뚝뚝한 표정으로 갈 길을 재촉하던 러시아인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기타 줄을 타고 흐르는 멜로디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차가운 광장의 공기를 조금씩 데워갔다.
긴장했던 경찰관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지던 그 순간, 한 청년이 다가와 내 손에 무언가를 덥석 쥐여주었다. 근처 매점에서 금방 사 온, 아직 꽁꽁 얼어있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이었다.
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민 아이스크림은 "우리 도시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메시지였다.
비포장도로의 진흙탕 사투를 앞두고 거칠어졌던 마음이 아이스크림 한 입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고난은 몸을 지치게 하지만, 결국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은 우리 영혼을 다시 춤추게 한다.
온천과 흙탕물, 그리고 유럽으로 가는 험난한 신고식
옴스크를 떠나 튜멘(Tyumen)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여유가 있었다. 이곳의 야외 온천이 유명하다기에 찾아갔다. 입장료 600 루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시베리아의 찬바람이 잊혔다.
"여보, 이제 고생 끝인가 봐. 온천도 하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시베리아는 우리에게 편안함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온천은 앞으로 닥칠 '진흙탕 전쟁'을 대비한 마지막 목욕재계였다.
내비게이션의 배신, 17km의 지옥
예카테린부르크로 향하는 길, 내비게이션이 지름길이라며 안내한 곳은 악몽 그 자체였다. 갑자기 아스팔트가 끊기더니 자갈과 웅덩이가 뒤범벅된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설마 계속 이런 길은 아니겠지?"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17km의 빨래판 도로였다.
에벤에셀은 성난 짐승처럼 덜컹거렸고, 시속 10km로 기어가야 했다. 온천에서 씻은 몸과 차는 금세 흙먼지투성이가 되었다.
그때, 흙바람 속에서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그는 팔로 크게 공중에 X자를 그리며 외쳤다.
"니엣! 니엣! (안 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 길로 계속 가면 큰일 난다"라는 절박한 눈빛이었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오지에서 할아버지는 손짓발짓으로 우리를 말렸고, 덕분에 우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 전에 겨우 차를 돌려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를 구하러 온 시베리아의 수호천사였을까?
아시아여 안녕, 1초 만에 넘은 유럽
하지만 이 모든 고생은 한순간의 감동을 위한 빌드업이었나 보다. 도시 외곽 숲길에 서 있는 '아시아-유럽 경계비'. 우리는 비석 앞에 그어진 붉은 선 앞에 섰다. 흙길을 구르고, 사기를 당하며 달려온 길.
"여보, 이 선 넘으면 진짜 유럽이야."
하나, 둘, 셋. 폴짝! 단 1초 만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몸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중력이 달라진 기분.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흙투성이가 된 에벤에셀을 다독였다.
"수고했다, 이제 유럽 차가 된 거야."
예카테린부르크 세차장: "피니시!"
우여곡절 끝에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 도착했을 때, 에벤에셀은 진흙 괴물이 되어 있었다.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세차장 'AQUAGIZER'로 들어갔다. 처음에 1,000 루블을 부르던 직원과 흥정해 600 루블에 합의를 봤다.
그런데 이 직원, 거품 솔질은커녕 물만 휘휘 뿌리더니 해맑게 외쳤다. "피니시(Finish)!"
찌든 때는 그대로인데 끝이라니? "노! 거품! 브러시!"라고 항의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비포장도로에서 고생하고, 세차장에서 눈 뜨고 코 베인 기분.
우리는 얼룩덜룩한 차를 끌고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이 준 가장 큰 선물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 아래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유럽으로 향할 새로운 설렘을 가득 채웠다.
수만 번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거친 험로를 묵묵히 밀고 나간 에벤에셀처럼, 우리 부부 또한 서로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보듬는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타이어가 닳고 먼지가 쌓이는 만큼 우리의 여정은 거칠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자갈길의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일궈낸 이 결속력이야말로 대륙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아시아에서의 고단했던 신고식은 이 감격스러운 입성만으로도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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