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지옥의 비트 된장찌개와 우랄의 뜨거운 밤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핏빛으로 물든 저녁 식사, "지옥에서 온 된장찌개"


우랄산맥의 거친 숨결을 뒤로하고 드디어 유럽의 관문인 예카테린부르크에 입성했다.

이곳은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경계의 도시이자 우리에게 여행 중 가장 황당한 식탁과 가장 뜨거운 밤을 동시에 선사한 반전의 도시다.


러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캠핑카 여행에서 가장 그리운 것은 역시 고향의 맛이다. 며칠 전부터 구수한 된장찌개가 간절했던 우리는 장터에서 반가운 채소를 발견했다.


쪙은 흙이 잔뜩 묻은 둥근 채소를 보며 여기 감자는 속이 참 빨갛네 라며 신기해했다. 우리는 그것이 러시아의 국민 식재료 비트(Beet)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에벤에셀의 주방으로 가져왔다.

이날 우리는 된장찌개로 유럽에 신고식을 헀다.


사건은 냄비가 끓기 시작하면서 터졌다. 쪙이 정성껏 썰어 넣은 빨간 감자가 열을 받자 구수해야 할 된장찌개 국물은 순식간에 드라큘라가 아침 식사로 즐겼을 법한 기괴한 보랏빛으로 변해버렸다.


냄비 뚜껑을 연 순간 우리 부부는 동시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된장의 향기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비주얼이었다.


숟가락을 든 채 망설이는 나를 보며 쪙은 민망한 듯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여보 이거 먹어도 안 죽겠지"


나의 농담에 3평 남짓한 에벤에셀 안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비주얼은 테러 수준이었지만 막상 한 입 떠 넣은 국물은 의외로 달큼했다.


겉만 보고 감자인 줄 알았던 그 소박한 착각이 유럽에서의 첫 정찬을 세상에서 가장 코믹한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하도에서 만난 고려인의 혼, 빅토르 최


식사를 마치고 축제의 열기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한 지하 통로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마주했다. 러시아 록의 전설이자 고려인의 피가 흐르는 빅토르 최(Viktor Tsoi).


거리 악사들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 앞에서 노래를 토해내듯 부르고 있었다.

빅토르 최는 벽에서 내려와 노래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끝에서 온 우리가 유럽의 입구에서 우리와 닮은 영웅을 만나는 순간 그 묘한 동질감은 우랄산맥의 차가운 밤공기를 단번에 녹여 버렸다.

저항과 자유를 노래했던 그의 정신은 지금도 이 지하도에서 뜨겁게 숨 쉬고 있었다.


10만 명의 함성, 우랄의 밤을 깨우는 음악의 파도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거대한 음악의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도시 전체가 무대가 되는 러시아 최대의 음악 축제 우랄 뮤직 나이트의 절정이었다.


광장마다 설치된 무대에서 클래식과 록 비트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10만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는 대단했다.

축제 인파 머리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유럽(EBPOПA)이라는 이정표.

아시아의 끝에서 여기까지 에벤에셀과 함께 달려온 고단함이 그 뜨거운 함성 속에 눈 녹듯 사라졌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 서로의 마음에 도착하다.


이름 모를 이가 건넨 익살스러운 가면을 쓰고 우리는 국적도 나이도 잊은 채 현지의 열기에 몸을 맡겼다.


아시아의 끝에서부터 에벤에셀에 싣고 온 우리의 선율이 이곳 유럽의 함성과 하나로 섞이는 기분이었다.

쪙과 나는 가면 뒤로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빅토르 최가 노래했던 변화와 자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붉은 된장찌개로 배를 채우고 낯선 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춤을 추던 그 밤.


축제가 절정에 달한 새벽 1시,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백야였다. 우리는 에벤에셀의 작은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었다.


"뾰, 우리 정말 여기까지 왔네."


쪙의 한마디에 지난 시베리아 횡단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비로소 진짜 유럽의 품에 깊숙이 안겼음을 확신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화끈한 환영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제 타타르스탄의 심장 카잔을 향해 에벤에셀의 방향을 잡았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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