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카잔의 물대포와 블라디미르의 가위손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카잔의 물대포, 하늘이 시원하게 씻겨주다


아시아를 지나 드디어 유럽의 품으로 들어서는 길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카잔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우리는 거대한 자연의 세차장을 만났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폭우는 앞서가는 대형 트럭들을 집어삼켰고, 그들이 뿜어내는 물보라는 마치 시위 진압용 물대포처럼 에벤에셀의 앞유리를 강타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도로 위,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는 트럭들


와이퍼가 비명을 지르며 부러질 듯 춤을 추는 일촉즉발의 상황. 운전대를 잡은 나의 손에 땀이 맺힐 즈음, 옆자리의 쪙이 특유의 긍정 에너지로 정적을 깼다.


"여보! 세차장에서 돈 주고도 못 할 서비스를 하늘이 공짜로 해주네!"


그 말 한마디에 긴장은 웃음으로 변했고, 우리는 폭우를 뚫고 전진했다. 카잔 크렘린에 발을 들인 순간,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얼굴을 드러냈다.


씻겨 내려간 공기 너머로 쿨 샤리프 모스크의 영롱한 푸른 돔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탄성을 내뱉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웅장하게 서 있는 푸른 지붕의 쿨 샤리프 모스크


튜멘의 뜨거운 온천물부터 비포장도로의 흙탕물, 그리고 방금 맞은 카잔의 빗물까지. 온갖 물을 다 겪으며 달려온 에벤에셀의 고단함이 그 청명한 밤하늘 아래서 눈 녹듯 사라졌다.


우리는 깨달았다. 유럽이라는 경계는 지도 위의 국경선이 아니라, 빗속에서도 웃음을 찾는 마음과 낯선 이의 환대 같은 사람의 온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비와 태양 사이, 600km의 질주


카잔을 떠나 다시 서쪽으로 600km의 질주를 시작했다. 러시아의 날씨는 마치 심술궂은 어린아이 같았다.


출발할 때는 도로변 노점상들이 비를 맞으며 사과와 체리를 파는 처연한 모습에 마음이 아렸는데, 한참을 달리니 이번엔 태양이 앞길을 막아섰다.

운전석 정면을 강렬하게 내리쬐는 눈부신 태양 빛


오후 4시, 정면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선글라스를 뚫고 들어와 시야를 마비시키는 눈부신 고문이었다.

비와 태양이라는 두 얼굴의 길을 번갈아 맞으며 약 600km를 버텨낸 끝에 우리는 고도 블라디미르에 닻을 내렸다.


블라디미르의 마법사? 영락없는 재패니즈 스타일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 입성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시내의 '마법사(Charodeyka)'라는 뜻의 미용실을 찾았다.

블라디미르 시내에 위치한 Charodeyka 미용실 외관과 내관


이름처럼 마법 같은 변신을 꿈꿨으나, 그곳의 마법은 상상을 초월했다. 샴푸실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미용사는 대뜸 분무기로 내 머리에 물을 칙칙 뿌리더니 거침없이 가위를 휘둘렀다.


싹둑싹둑, 경쾌하게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과 비례해 나의 불안함은 수직 상승했다.

단 10분 만에 끝난 커트.


미용사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옆머리는 하얗게 밀려나갔고 윗머리만 붕 뜬, 영락없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앉아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머리 스타일을 확인하며 당황해하는 뾰의 모습


샴푸도 없이 드라이기 바람으로 머리카락만 대충 털고 나오며 쪙은 배를 잡고 웃었다.


"여보, 모스크바 가면 다들 일본 관광객인 줄 알고 사인해 달라고 하겠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모자를 깊게 눌러쓸 수밖에 없었다. 머리 스타일은 망쳤지만 블라디미르의 풍경은 영혼을 치유해 주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웅장한 성모승천 대성당과 황금의 문이 위용을 뽐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당의 화려함에 지칠 때쯤 만난 주유소의 천사


지친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주유소의 천사를 만났다. 외곽의 한 주유소 직원은 당황해하는 우리에게 선뜻 안전한 주차 공간을 내어주었고, 물 호스까지 빌려주며 마음껏 쓰라고 웃어 보였다.


덕분에 에벤에셀의 물탱크를 가득 채우고, 마트에서 사 온 싱싱한 체리와 소고기로 푸짐한 저녁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 이제 모스크바가 코앞이다. 일본 만화 캐릭터 같은 머리를 한 나와 든든한 동반자 에벤에셀은 내일, 러시아의 뜨거운 심장 속으로 당당히 들어간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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