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모스크바 8차선에 던져진 촌놈들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전쟁터 같은 8차선, 그리고 반가운 파란 간판


블라디미르를 떠나 서쪽으로 180km. 내비게이션의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줄어들자, 도로의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달렸던 시베리아의 낭만적인 2차선 국도는 잊어라. 눈앞에 펼쳐진 건 욕망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10차선 아스팔트였다.


"여보, 꽉 잡아! 여기 장난 아니야!"


모스크바 입성이다. 차들은 미친 듯이 질주했고, 깜빡이도 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칼치기'가 난무했다.

시골길만 달리던 우리 에벤에셀은 맹수들 틈에 던져진 순한 곰 같았다.


핸들을 잡은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 숨 막히는 정체 속에서, 갑자기 쪙의 눈이 커졌다.


"어? 저거 봐! 현대자동차다!"


도로변에 우뚝 솟은 파란색 간판. 낯선 땅, 전쟁터 같은 도로 위에서 만난 'H' 로고가 왜 그리도 눈물겹게 반가운지. 마치 만 리 타향에서 죽마고우라도 만난 것처럼, 고국의 상징은 그 존재만으로도 촌놈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었다.


"야! 우리 차도 한국 차야! 반갑다 친구야!"


우리는 창문에 코를 박고 대리점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마치 고향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선빵? 아니, 선주유!


기름이 간당간당했다. 눈에 보이는 주유소로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시베리아에서 늘 하던 대로, 차를 세우고 지갑부터 챙겨 카운터로 향했다.

러시아는 무조건 '선결제 후 주유'니까. 그런데 직원이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노! 노! 펌프 퍼스트!" "잉? 돈 먼저 안 받아요?"


대도시는 달랐다. 여기는 기름부터 넣고 나중에 계산하는 '선주유 후 결제' 시스템이란다.


"아니, 시골이랑 계산법이 다르네..."

우리는 촌놈처럼 어리바리하며 다시 차로 돌아와 주유기를 들었다.


뒤에 서 있던 모스크바 운전자들이 "빨리 좀 합시다"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 도시의 속도란 이런 거구나. 눈치코치 없으면 기름도 못 넣는 곳, 여기는 모스크바다.


아파트 단지 깊숙한 곳, 물동이 나르는 남자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가기 전, 에벤에셀의 몰골을 확인했다. 비포장도로의 진흙과 시베리아 벌레들의 사체가 뒤범벅된 상태. 이 꼴로 붉은 광장에 가면 입구 컷 당할 것 같았다.


"씻고 가자. 때 빼고 광내야지."


하지만 대도시 세차장들은 야박했다. "빅 카(Big car) 노!"를 외치며 문전박대하기 일쑤.


우리는 얀덱스 지도를 켜고 숨은 세차장을 찾아 헤맸다. 한참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어느 낡은 아파트 단지 구석의 허름한 세차장. 인상 좋은 주인장이 700 루블에 세차를 허락했다.


"물도 좀 채워도 될까요?" "그러슈."


문제는 장비였다. 수도꼭지는 있는데 호스가 맞지 않았다. 물탱크는 텅 비었고, 호스는 무용지물. 남은 건 내 튼튼한 몸뚱어리뿐이었다.


나는 비장하게 10리터짜리 접이식 물통(워터백)을 꺼내 들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차까지 10미터.

깔때기를 대고 붓는다. 콸콸콸... 쪼르륵. 150리터를 채우려면? 이 짓을 열다섯 번 해야 한다.


"하나... 여보 힘내! 둘... 아이고 잘한다!"


쪙은 옆에서 응원단장 노릇을 하고, 나는 물지게 지는 머슴처럼 세차장을 왕복했다. 모스크바 아파트 단지 한복판, 땀을 뻘뻘 흘리며 물통을 나르는 동양인 아저씨. 지나가던 주민들이 "저 사람은 대체 뭐 하는 건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열다섯 번째 물통을 붓고 나니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하지만 게이지가 'FULL'을 가리키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물동이로 다져진 무식한 체력의 촌놈들이 지금 당당히 입성한다!


"됐다! 배도 채웠고(주유), 몸도 씻었고(세차), 물도 마셨다(급수)!" 비로소 우리는 모스크바라는 거대한 정글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덤벼라, 붉은 광장! 우리가 간다!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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