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시차라는 이름의 덤, 시간을 낚는 에벤에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바롭스크로 향하는 본격적인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에벤에셀의 바퀴가 서쪽으로 구를 때마다 우리 부부는 기묘한 물리적 마법을 체험했다.
분명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 배웠건만, 대륙을 횡단하는 우리에게 시간은 고무줄처럼 유연하게 늘어났다. 서쪽으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핸드폰 시계는 마치 마법처럼 한 시간 전으로 되돌아갔다.
덕분에 우리는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보너스로 얻어 시베리아의 노을을 조금 더 오래 가슴에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태양과의 무모한 시합, 그리고 찬란한 벌칙
서쪽으로 서쪽으로, 더 깊은 대륙의 심장부로 향하며 나는 본의 아니게 태양과 무모한 달리기 시합을 벌이곤 했다.
태양보다 일찍 일어나 한참 먼저 출발하고 지지 않으려 가속 페달을 밟아댔지만 태양의 걸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오를 넘어서는 언제나 태양이 내 앞에서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시합에서 패배한 뾰에게 돌아온 벌칙은 가혹하리만큼 찬란했다. 서쪽 지평선에 걸린 태양은 밤늦도록 에벤에셀의 앞유리를 정면으로 사격했고, 나는 그 눈부신 광휘에 눈을 찌푸리며 밤늦게까지 벌칙과도 같은 잔상을 견뎌야 했다.
에벤에셀을 덮친 벌레 습격의 전율
시베리아 대륙은 공짜 선물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원시림이 뱉어낸 수만 마리의 날벌레와 이름 모를 곤충 떼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에벤에셀의 은빛 몸체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바롭스크로 가는 길목, 이름조차 기묘한 ‘777 카페’ 앞에 에벤에셀을 세우는 순간, 우리는 차마 문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주행 내내 전면 유리를 때리던 ‘탁! 타닥!’ 하는 기분 나쁜 타격음은 전조에 불과했다.
777 카페 앞에서 드러난 에벤에셀의 몰골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수만 마리의 날벌레 사체가 겹겹이 쌓이면서 전면 유리는 이미 시야를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도배되었다.
와이퍼를 돌려보았지만, 으깨진 사체들이 유리에 찐득하게 번지며 오히려 앞을 더 가로막을 뿐이었다.
3평의 요새는 순식간에 곤충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해버렸다.
유리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사체들은 마치 강력 접착제를 발라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처절한 흔적들은 마치 대륙이 우리에게 던지는 “이 거친 길을 감당할 기개가 있느냐?”라는 묵직하고도 냉혹한 첫 번째 시험지와 같았다.
분홍색 거품이 만들어낸 뜨거운 반전
도저히 이대로는 전진할 수 없었다. 에벤에셀의 얼굴을 닦아내기 위해 근처 세차장으로 차를 밀어 넣었을 때, 주인은 에벤에셀의 거대한 덩치를 보더니 큰 차는 세차가 안 된다며 난감해했다.
하지만 이내 우리의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맘씨 좋은 주인장은 흔쾌히 물을 내어주었고, 나는 연신 "스파시바(고맙습니다)!"를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찌든 벌레 사체들을 지우기 위해 세차기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선명하고 화사한 분홍색 비누 거품이었다. 마치 3평의 요새가 거대한 핑크색 솜사탕으로 변해버린 듯한 그 우스꽝스럽고도 환상적인 모습에, 긴장으로 굳어있던 우리 부부의 얼굴에는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뚝뚝해 보이던 러시아 사나이가 투박한 손으로 고압건을 들고 에벤에셀의 구석구석을 닦아내자 비로소 은빛 위용이 다시 살아났다.
서툰 발음으로 "스파시바!"를 연신 외치는 우리에게 그는 말없이 툭,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하바롭스크로 가는 길의 세차장은 단순한 정비소가 아니라 대륙이 건네는 첫 번째 우정의 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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