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대륙의 비, 그리고 3평의 빗속 레스토랑
우수리스크의 온기를 뒤로하고 하바롭스크를 향해 북진을 시작하자마자, 시베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6월의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와 강풍이 몰아쳤다.
선팅지를 뜯어내 투명해진 앞유리창으로 사정없이 들이치는 빗줄기를 보며, 나는 와이퍼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해야 했다. 보호막 없는 생눈으로 마주한 시베리아의 첫인상은 이토록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에 더 이상의 주행은 무리였다.
우리는 지도상에 뱌젬스키(Vyazemsky)라고 표시된 작은 마을 인근의 한적한 공터에 급히 에벤에셀을 세웠다. 다행히 바닥은 단단해 보였고, 도로와도 적당히 떨어져 있어 하룻밤 묵어가기에 안성맞춤인듯했다.
"여보, 비도 오는데 오늘 저녁은 삼겹살 어때?"
"콜! 빗소리 들으면서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히겠는데?"
우리는 에벤에셀의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투둑투둑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천연 ASMR이 되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버너 위에 불판을 올리고 두툼한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와 빗소리의 환상적인 이중주. 고소한 기름 냄새가 3평의 우주를 가득 채웠다.
상추쌈에 잘 익은 고기 한 점, 그리고 빗소리라는 반찬 그 순간 에벤에셀은 세상 그 어떤 미슐랭 맛집도 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빗속 레스토랑이었다.
"러시아 비도 별거 아니네. 이렇게 낭만적일 줄이야."
우리는 다가올 재앙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배부르고 등 따뜻한 호사를 누리며 잠이 들었다.
뱌젬스키의 배신, 늪에 빠진 에벤에셀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자, 이제 하바롭스크로 가볼까?"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윙- 위잉-. 어라? 차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바퀴가 헛도는 느낌이 등골을 타고 전해졌다.
급히 차에서 내려 바닥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어제 그 단단해 보였던 흙바닥은 밤새 내린 비를 머금고 거대한 진흙 늪으로 변해 있었고, 에벤에셀의 육중한 뒷바퀴는 이미 발목까지 푹 잠겨 처박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뱌젬스키 인근 도로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 중이라 아스팔트가 깎여 나간 곳이 많았는데, 그 맨살을 드러낸 흙들이 밤새 빗물을 머금어 마치 찰떡같은 점토 수렁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어떡해... 차가 안 움직여요?"
쪙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내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낭만적이었던 빗소리의 대가는 혹독했다. 러시아의 흙은 한국과 달리 물을 먹으면 끈적한 점토처럼 변해 타이어를 결코 쉽게 놔주지 않았다.
사투 끝의 탈출, 낭만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주변에서 나뭇가지와 돌을 주워와 바퀴 밑에 깔았다.
"쪙, 내가 엑셀 밟을 테니까 뒤에서 상황 좀 봐줘!"
부앙-! 검은 매연과 함께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에벤에셀은 '꺼내줘!'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전진과 후진을 수십 번 반복하며 바퀴 밑에 계속해서 돌을 채워 넣었다.
신발과 바지는 이미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어젯밤의 그 우아했던 삼겹살 파티는 온데간데없고, 흙탕물 뒤집어쓴 꼴이라니.
30분 같은 3분의 사투 끝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에벤에셀이 늪을 박차고 딱딱한 도로 위로 올라섰다.
"살았다!"
우리는 흙투성이가 된 서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뱌젬스키의 공터를 보며 나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비 오는 날, 비포장도로는 절대 낭만이 아니다.'
대륙은 우리에게 삼겹살의 추억과 진흙탕의 악몽을 동시에 선물하며, 초보 여행자들에게 또 한 번의 매운 예방주사를 놓아주었다.
*매주 화, 목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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