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루스키 섬의 여우, 그리고 마린스키의 행운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나초는 거절한다, 루스키 섬의 도도한 여우


블라디보스토크 3일 차. 드디어 에벤에셀을 인수하고 눈물의 선팅지 제거 작업까지 마쳤다. 비록 유리창은 훤히 뚫렸지만, 내 차를 되찾았다는 해방감에 우리는 지체 없이 루스키 섬(Russky Island)으로 향했다.


'북한 섬'이라고도 불리는 토 비진 곶(Tobizin Cape)을 향해 달리는 길.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차창을 때렸지만, 뻥 뚫린 바다 풍경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경치 좋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점심을 먹으려는데,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뾰, 저기 좀 봐요! 여우 아니에요?"


쪙의 다급한 손짓을 따라가 보니, 야생 여우 한 마리가 마치 제집 안방인 양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동물원에서나 보던 녀석을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하다니.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아껴둔 '나초(Nacho)' 과자를 꺼내 던져주었다.


"자, 한국 과자야. 한번 먹어봐."


하지만 녀석은 킁킁 냄새만 맡더니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러시아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소시지를 넙죽 받아먹는 게 아닌가.


"와, 러시아 여우라고 입맛도 러시아식이네. 한국 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시지만 밝히는 그 도도한 여우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선팅지를 뜯겨나간 에벤에셀의 상처를, 시베리아의 대자연이 귀여운 생명체를 통해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거지와 황제 사이, 마린스키의 행운


다음 날인 5월 30일. 우리는 여전히 '생존 모드'였다. 물을 구하기 위해 세차장을 돌며 "보다(물) 플리즈"를 외쳐 겨우 물탱크를 채웠다.


하지만 이날 저녁만큼은 황제가 되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자랑, 마린스키 극장(연해주관)을 찾은 것이다.


"러시아까지 왔는데 발레는 한번 봐야지?"


우리는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저렴한 900 루블짜리 5층 꼭대기 좌석을 예매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좁은 차 안에서 찌개를 끓여 먹고 꼬질꼬질한 몰골로 발레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행운이 다가왔다.

평일이라 빈 좌석이 많았는지, 안내 직원이 우리 표를 보더니 손짓했다.


"오늘 5층은 개방하지 않으니 2층으로 내려가세요."


우리가 안내받은 자리는 무려 2,400 루블짜리 좌석이었다. 5층 꼭대기에서 2층으로의 기분 좋은 수직 상승.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보랏빛 벨벳 의자와 황금빛 테라스가 나타나자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세상에, 뾰! 어제 선팅 떼느라 고생했다고 하늘이 보너스를 주시나 봐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서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선율이 흐르고 무용수들의 우아한 몸짓이 펼쳐졌다. 순간, 현실의 모든 시름이 멎었다.


어제는 야생 여우와 흙먼지 속을 뒹굴었는데, 오늘은 귀족처럼 발레를 감상하고 있다니.


물 한 방울에 일희일비하고 뜻밖의 호사에 감동하는 이 롤러코스터 같은 반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여행의 진짜 맛이었다.


우수리스크, 역사의 페치카를 만나다


화려한 환희를 뒤로하고 다음 날(5월 31일), 우리는 100km를 달려 우수리스크(Ussuriysk)에 도착했다.


이곳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3.1 운동 100주년의 해,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님의 고택을 찾았다.



입장료 100 루블을 내고 들어선 그곳엔, 안중근 의거의 숨은 공로자이자 시베리아 동포들의 따뜻한 난로(페치카)였던 선생님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이상설 선생님 유허지. 아무런 표식도 없는 허허벌판, 선생님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 푼 강가에 섰다. 차가운 강바람만이 그날의 슬픔을 기억하는 듯했다.

우리는 이름 모를 들꽃을 꺾어 비석 앞에 헌화하고 잠시 묵념했다.


그때 강가 너머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러시아 소녀가 보였다.

우리가 손을 흔들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도도한 모습이었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조차 선생님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미래의 한 조각처럼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졌다.


편견을 깨뜨린 빗속의 천사들


역사의 무게를 가슴에 담고 주일 예배를 위해 '시온교회'를 찾아 나선 길.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매는데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난감해하던 우리에게 다가온 건 다름 아닌 러시아 여학생들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을 위해 아이들은 10분이 넘는 거리를 기꺼이 동행하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 맑은 뒷모습을 보며 쪙이 감동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자기들 갈 길도 바쁠 텐데... 정말 고맙네요."


교회 근처 고아원 앞에서 만난 인상 좋은 아주머니는 한술 더 떴다. 자신의 약속도 잊은 채 에벤에셀 보조석에 훌쩍 올라타더니, 복잡한 골목 안까지 직접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거대한 캠핑카가 골목을 통과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아주머니는 차에서 내려 직접 발로 뛰며 길을 살폈다. "여긴 안 돼요! 이쪽으로 돌려요!" 다급하게 손짓하며 에벤에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뛰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네 이웃이었다.


"러시아 사람들 무섭다는 말,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저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데..."


예배를 마치고 에벤에셀 안에서 쪙이 권영세목사님을 대접하기 위해 끓여낸 고추장찌개를 떠먹으며 우리는 한참 동안 그 '반전의 온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팅지를 떼어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창만큼이나, 러시아를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지평선의 부름, 시베리아를 향해


"뾰, 이제 정말 두렵지 않아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길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쪙의 말에 나는 묵묵히 에벤에셀의 엔진을 깨웠다. 마린스키의 환희와 우수리스크의 역사,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거대한 지평선보다 더 깊은 울림을 안고 시베리아의 심장을 향해 나아간다.


에벤에셀, 출발이다!


*매주 화, 목요일에 새로운 이야기가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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