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블라디보스토크입성, 선팅지를 뜯으며 흘린 눈물

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by 편부효

7번 게이트가 열리고 마주한 잿빛 블라디보스토크


22시간의 항해 끝에 이스턴 드림호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닻을 내렸다. 배 안에서 내다본 항구는 거대했고, 잿빛 안개가 항구 위에 낮게 눌러앉아 있었다.

오후 2시 10분, 드디어 7번 게이트가 열렸다


"뾰, 우리 진짜 내리는 거죠?"


쪙의 목소리에 설렘보다 긴장이 앞섰다.

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으로 향하는 길,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5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파고들었다.


우리는 미리 연락해 둔 대행사 직원(샤샤)을 만나 유심부터 해결했다. MTC 매장에서 1,000 루블을 주고 개통한 유심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첫날 저녁, 낯선 땅에서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식당 '명가'였다.


뜨끈한 해물뚝배기와 매콤한 제육볶음을 주문했다. 한국보다 더 한국 같은 맛에 쪙과 나는 말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여보, 이제 시작이네요."


뜨거운 국물을 넘기며 우리는 서로의 눈을 확인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낡은 건물들 사이로 안개 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첫인상은 '기다림': 에벤에셀은 어디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차량 인수를 위해 여객선 터미널로 달려갔다. 어서 빨리 에벤에셀을 되찾아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행사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제의 강풍과 폭우로 인해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전면 지체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오늘 차를 뺄 수 없게 됐어요. 내일 다시 오셔야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차 안에 옷가지며 생활용품이 다 들어있는데, 당장 맨몸으로 하루를 더 버텨야 한다니. 항구 저 멀리, 배 안에 갇혀 있을 에벤에셀을 바라보며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졸지에 '뚜벅이 신세'가 된 우리는 관광객 모드로 빠르게 전환해서 기분을 풀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과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레닌동상과 아르바트거리도 거닐었고 저녁에는 그 유명하다는 그루지아 식당 '수프라(Supra)'를 찾았다.


그야말로 입구부터 인산인해였다. 대기번호 27번.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식당 안은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였다. 숯불 향 가득한 샤슬릭과 치즈가 넘쳐흐르는 하차푸리를 먹으며 우리는 잠시 에벤에셀 걱정을 잊었다. 입안 가득 터지는 육즙은 낯선 대륙이 건네는 첫 번째 환영 인사 같았다.


하지만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세관 마당에 갇혀 있을 우리 차 생각뿐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첫 교훈은 명확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물로 긁어낸 선팅지와 에벤에셀의 부활


셋째 날 오전 11시, 드디어 차량 통관 절차가 재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달음에 달려가 세관 마당 한복판에 늠름하게 서 있는 에벤에셀을 본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틀 만의 상봉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대행사 직원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사장님! 이 앞유리 선팅, 러시아에서는 100% 불법입니다."


그는 우리 차를 보고 깜짝 놀라며 경고했다. 도로에 나가면 곳곳에서 기다리는 경찰에게 무조건 걸리고, 걸릴 때마다 1,000 루블씩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절차도 복잡하니 당장 제거하고 운행하라는 강권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유럽의 강한 자외선과 '맞짱' 뜨기 위해, 그리고 우리 부부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서 공들여 시공한 열 차단 선팅지였다.

벌금을 낼 각오로 왔지만, "첫 여행지부터 범법자가 될 순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찌익- 찌이익-'


강풍이 몰아치는 세관 마당에서 손톱이 뒤집어지도록 선팅지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접착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뜯어지지 않았다. 쪙은 옆에서 뜯겨나가는 필름을 붙잡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물을 머금고 1시간 넘게 사투를 벌인 끝에 에벤에셀의 앞유리는 투명하게 변했다. 우리 부부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지만, 쪙은 끈끈이가 묻은 내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괜찮아요. 이제 러시아를 더 맑게 볼 수 있잖아요."


모든 절차를 마치고 세관을 빠져나왔을 때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앞 노점상으로 향했다.


"케밥 하나 주세요."


기름기 좔좔 흐르는 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케밥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 가득 천국이 펼쳐졌다.


선팅지 뜯느라 엉망이 된 손으로 쥐고 먹던 그 길거리 케밥은 우리가 겪은 고생을 위로해 주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만찬이었다.


지저분한 유리창 너머로 안개 낀 항구가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비로소 진짜 여행자가 되어 러시아인의 삶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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