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캠핑카 여행, 50대 부부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
생존을 위한 치밀한 준비: 무말랭이와 호박고지 작전
2019년 5월, 동해항으로 떠나기 전, 우리의 집은 흡사전쟁터의 보급 창고를 방불케 했다.
363일, 장장 4만 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 가장 큰 걱정은 역시 '먹고사는 문제'였다.
쪙과 나는 비장한 각오로 식품 건조기를 24시간 풀가동했다. 무를 썰어 말려 무말랭이를 만들고, 호박을 다듬어 호박고지를 만들었다.
"뾰, 이 정도면 시베리아 한복판에 고립되어도 끄떡없겠어요."
바짝 마른 식량들을 진공 포장기로 압축하고, 김장 때 준비해 얼려둔 김치 속 양념, 깻잎김치, 각종 반찬까지야무지게 챙겨 넣었다.
천안 집의 가스, 수도, 전기를 모두 끊고 에벤에셀의 트렁크를 닫던 순간, 그곳은 단순한 짐칸이 아니라 우리의 든든한 생존 창고가 되었다.
특히 먹는 물의 안전을 위해 좁은 싱크대 아래에 직접 몸을 구겨 넣고 설치한 3M 정수기는 시베리아 오지로향하는 우리 부부의 가장 든든한 보험이었다.
시작은 '단속'이었다: 대륙이 던진 매운맛 경고
드디어 결전의 날. 항구로 내려가는 길은 설렘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앞섰다. 10년을 꿈꿔온 유라시아 횡단, 그 첫걸음을 떼기 위해 우리는 '에벤에셀'과 함께 동해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륙은 우리가 배에 오르기도 전에 추암해변 인근에서 잊지 못할 예방주사를 먼저 놓아주었다.
"저기요, 차 좀 세워보세요."
바닷가 도시시내를 지나 항구로 향하던 중, 느닷없이 경찰의 경광등이 우리 뒤를 비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출발도 하기 전에 무슨 일이지?' 당황해서 차를 세우자 경찰이 다가왔다. 원인은 다름 아닌 번호판이었다.
러시아 땅을 밟자마자 달리고 싶은 마음에, 한국 번호판 위에 미리 제작해 둔 외국용 번호판을 덧씌워 달았던 게 화근이었다.
경찰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멈춰 세웠고, 횡단을 앞두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했던 내 자존심에는 그날 첫 번째 금이 갔다.
“저기, 저희가 오늘 러시아로 출국하는데 미리 준비하느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다행히 현장에서 즉시 번호판을 다시 떼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손끝의 떨림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대륙으로 향하는 길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다.
슬리퍼 실종 사건: 동해 식당에서의 허탈한 이별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배에 오르기 전 동해의 한 야외식당에 들렀다. 뜨끈한 식사로 속을 채우고 나오려는데, 이번엔 내 슬리퍼가 문제였다. 식당에 들어갈 때 분명히 벗어두었던 내 슬리퍼 한 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내 슬리퍼 어디 갔지? 방금 전까지 신고 있었는데!"
식당 입구를 샅샅이 뒤졌지만 슬리퍼는 자취를 감췄다4만 킬로미터를 달릴 준비를 마친 거창한 여행자가, 고작 동해의 한 식당에서 슬리퍼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맨발로 서 있는 꼴이라니.
"뾰, 정신 똑바로 차려요. 지금 신발 잃어버릴 때가 아니라고요."
쪙의 타박이 뼈아프게 와닿았다. 결국 나는 짝 잃은 슬리퍼 대신 짐 깊숙이 있던 투박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그 묵직한 신발 무게가 마치 '이제부터는 장난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발은 여행이 아니라 현실을 밟기 시작했다.
이스턴 드림호의 밤: 멀어지는 불빛을 보며
2019년 5월, 강원도 동해항. 에벤에셀의 육중한 몸체가 페리호의 거대한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나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10년을 품어온 꿈이 비로소 육지를 떠나 바다 위로 떠오른 것이다.
멀어지는 동해항의 불빛을 보며 쪙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단속의 당혹감과 슬리퍼의 허탈함이 뒤섞인 묘한 기분. 배 엔진의 낮은 진동이발바닥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우리가 진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화려한 환송식도, 낭만적인 건배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리얼했다. 슬리퍼 한 짝은 동해에 바친 제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싣고,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서 진짜 시작을 준비했다.
페리호 위의 축제, 그리고 쪙의 미소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페리호 안은 이미 하나의 작은 축제장이었다. 3평의 좁은 요새를 벗어나 망망대해를 마주한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쪙과 함께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었고, 다가올 미지의 땅을 향해 가슴 벅찬 건배를 나누었다.
"여보, 우리 진짜 가는 거지?"
쪙의 눈동자에는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이 공존했다. 그 눈빛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할 것은 승리의 환호성뿐일 것이라고. 하지만 바다는 말이 없었고, 대륙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우리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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