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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유진 Nov 16. 2019

30살, 회사를 그만두고  태국에서 귀농하다.

그곳의 국적이 없는 아이들의, 그리고 나의 이야기

30살, 금융권 정규직 경력 7년 차. 나는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태국의 시골로 이사했다.

나의 새로운 거주지는 치앙라이 주변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는, 지난 7년간 내가 봉사해 온 보육원이 있다.

국적이 없다고?

무국적자(stateless perso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니면 주변에 국적이 없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곳에 오기 전까지 불법체류자의 이슈는 들어 보았어도, 국적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국적이 없다는 것은 곧 교육, 의료 같은 서비스는 물론 주거지를 이동할 수 있는 권리와 재산권도 없다는 말이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세 나라의 국경이 맞대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한 이곳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는 많은 수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편 생산지였으며, 산속에서 살고 있던 많은 소수민족들은 마약왕들의 전략적인 약 배포로 아편에 중독되어 아편을 대가로 헐값의 노동을 제공하여 왔다. 태국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선왕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업적 중 하나는 이 지역의 아편 밭들을 밀어내고, 그곳에 커피나무를 심어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아편이 아닌 커피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수 대를 이어내려온 중독의 뿌리는 깊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아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이 아편에 중독된 아이들은 출생신고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어떤 경우는 4~5세쯤 될 때부터 부모님의 강요로 관광객이 많은 국경 지대에 나와 약값을 벌기 위해 구걸을 시작한다. 부모님이 정해 준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집에 들여보내 주지 않으므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갱단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본드를 불며 허기를 잠재운다. 잠은 국경의 다리 밑에서 잔다. 말 그대로 근본 없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들인 것이다.


보육원에서는 이와 같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정부에 주기적으로 [김철수]라는 아이가 있으며 시설에서 보호하고 있고 교육을 시키고 있음을 보고하여 아이가 흰색 바탕의 [밧 후아 쑨]이라고 하는 일종의 한정적 거주권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밧 후아 쑨]을 받더라도 아이가 주변의 미얀마에서 탄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즉, 태국 국민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는 국경 주변의 일정 거리 내에서 생활하여야 한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는 보통 허락된 거리 내에서 일용직으로 평생을 생활하고, 가난이 대물림된다.


이와 같은 실정을 20대 초반에 마주친 후 나에게는 작은 꿈이 생겼다. 내가 얼굴을 알고, 또 내 얼굴을 알고, 서로 이름을 아는 이 아이들의 인생에는 내가 작게나마 변화를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꿈. 만으로 정확히 30세가 되던 해, 나는 태국으로 이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째는 보육원 내에 학교가 생겼는데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보육원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번째 이유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첫 번째 이유 - 선생님의 부재 - 는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있어야 해결이 되는 문제였다.


주변의 반응은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훌쩍 [봉사활동]의 명목으로 1~2년을 떠날 만큼 어리지 않았고, 미혼의 여성이었으며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많이 걱정했다), 건강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갈수록 덜 어려질 것이며, 성별은 바꿀 수 없고, 결혼 후에는 이렇게 깡촌으로 훌쩍 떠날 수도 없을 것이다. 즉, 마음먹은 지금이 적기였다.


가장 두려운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을 것이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수입을 벌겠다는 애매한 계획이 있었을 뿐, 나에겐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7년 동안 현지에서 직접 뛰겠다는 일념으로 태국어 공부를 많이 해 놓고 자주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이곳이 매우 익숙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되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생활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예컨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그런 문제들.


꿈이 현실이 될 때

태국에 도착한 지 2주 정도 지나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모든 프리랜서 플랫폼에 프로필 등록을 하고 번역 일감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초보라지만 달에 30만 원 정도는 채울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기대는 첫 주 후 와장창 부서졌다. 나는 레퍼런스가 없었고, 고객은 나의 번역 능력을 믿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결국 핸드폰을 부여잡고 최저시급이 안 되는 금액으로 수주받을 수 있는 조그마한 일감들을 찾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봉사자로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요, 두 번째는 내년 보육원 재정 마련을 위해 아이들과 기르는 커피 판매 사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비는 시간에 틈틈이, 그러나 고객에게 좋은 리뷰를 받을 수 있도록 빨리, 일을 하자니 힘에 부쳤다. 태국의 날씨는 덥고, 나는 삼시세끼 시장에서 사 온 실온에 보관되던 고기, 논에서 잡은 게를 넣은 쏨땀 등 고리스크(?)의 현지식만 먹고 있었다. 결국 3주 정도 지나서 몸이 으슬으슬하니 추워지더니, 후덥지근한 더위에 배가 살살 아프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태국에 사는 외국인은 다들 한 번씩 걸린다는, 소위 [방콕 벨리 Bangkok Belly]라고 하는 적응성 배앓이였다. 아프기 전까지 내가 번 돈은 10만 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안타깝지만 몸이 나아지기 전까지 일을 쉬어야 했다. 순간 나 자신이 처량해졌다. 앓아누울 정도로 일하고 번 돈이 고작 10만 원이라니! 설상가상으로 축구에 푹 빠진 남자아이들 중 한 녀석이 맨발로 공을 차다 발톱이 깨져서 온 날이었다. "피유진 ("피"는 우리나라의 '언니','누나','오빠'와 같은 의미다), 축구화가 갖고 싶어요." 예전 같았으면 호기롭게 녀석들에게 모두 축구화를 선물해 주었을 것이었다. 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수입으로는 나의 방값을 겨우 내는 수준이었다. 순간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돈이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말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몸이 아픈 탓이었는지 마음이 허한 탓이었는지 모른다.

그 날은 축 처진 상태로 부엌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조그마한 바나나가 쑥 내밀어진 것은.

"피유진, 아 해!"

저돌적으로 내밀어지는 바나나에 저절로 입이 벌려진다. 바나나가 쑥 들어왔다. 달고 맛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저기서 땄어. 하나 더 먹어!"

"언니 배부른데. 하나만 먹을래."

"안돼! 두 개 안 먹으면 삐질 거야!"

어느새 두 번째 초 유기농 바나나가 입 앞에 와 있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아주 일품이었다.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바나나도 군말 없이 먹었다. 녀석의 미간의 내 천자가 매우 깊었던 까닭이었다.

바나나 두 개의 꼬다리까지 다 먹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녀석의 미간이 맨들해졌다.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씩씩하게 돌아가는 녀석 뒤로, 걸핏하면 학교를 땡땡이치는 말썽쟁이가 나타났다.

"피유진, 저도 영어 배우고 싶어요."

네가?

원체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녀석이라 얼떨떨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알파벳은 아니?" "네." "알파벳을 붙여 놓으면 읽을 수는 있니?""... 아니요."

파닉스반은 3시 30분에 수업이 있으니 아무 때나 와도 좋다고 얘기하곤 자리를 떴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중학생 남자아이 두 명을 지나쳤다.


"피유진! 얘도 영어 공부하고 싶대요!"


크게 소리치는 녀석 옆에, 말수 적은 아이가 수줍게 웃었다. 아이는 묵묵히 일하는 타입이었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보육원에서 전달한 1차 수강생 리스트에 없었다. 나는 당연히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파벳은 아니?" "네." "알파벳을 붙여 놓으면 읽을 수는 있니?""... 아니요."

똑같이 파닉스반은 3시 30분에 수업이 있으니 내일 오라고 했다.


배우고 싶은 마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다음 날 3시 30분에 공책과 연필을 들고 나타난 두 녀석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고 몽글몽글해졌다. 물리적으로 사람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 서로 정을 나누고, 고마움을 나누고, 배움을 나누는 시간들. 살을 부비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나누는 것. 아이들을 통해 그것을 조금이나마 확인받은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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