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말씀을 듣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악마의 이론이다.
인류의 역사엔 세상이 깜짝 놀란 사건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 지동설도 당시엔 하늘이 무너지는 이론이었으며, 결국 그는 파문을 당하고 가택에 연금돼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는 묘비도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랬던 갈릴레오의 복권은 300년이 지난 1992년, 파문을 했던 교황청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동설도 의식하지 않고 살면 여전히 우리는 해가 뜨고 진다고 여기며 살게 된다.
현대인들이 보고 듣는 대부분의 것들은 의식하지 않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지배하여 마치 처음부터 자기 생각인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드는 생각을 알아차리려 노력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생각과 행동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착각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좋은 세상을 만들길 원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곤 하는 것이다. 지난 17, 18대 대통령 선거처럼 말이다.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종교적, 특히 한국 교회의 수준 이하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설교,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많은 성도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땐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신 가장 큰 이유는 정통성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뭐하러 수많은 아이들의 피를 보면서까지 다윗의 혈통을 쫓아오셨겠는가? 그냥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셔서 타고난 권력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면 될 것을!
한 나라의 지도자는 절대 민족을 배신한 집안에서 나와서는 안된다.
한나라의 지도자는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국을 배신한 자나 그의 후손들이 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다윗처럼 자신은 못한다고 숨는 자를 들어서 쓰시지 어느 장로처럼 자기 아니면 안 된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며 나서는 자는 절대 쓰시지 않는다. 그래 놓고는 한 나라의 강산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자자손손 후손들이 갚지 못할 빚을 만들어 놓고는 신의 뜻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신은 물론 지구가 멸망해도 끝덕없을 재산을 어딘가에 비축하고 말이다. 다윗과 솔로몬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아주 기본적인 것을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쳤다면 우리는 두 명의 자격 없는 대통령이 나라를 엉망으로 해놓고 후손에게까지 참담함을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의 조찬기도회에, 근데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나?, 기가 막힌 기도를 해대던 죽전의 모 교회 목사의 기도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이천 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로마 총독에게 하던 대제사장과 뭐가 다른가? 거기에 곧 파면될 대통령을 찾아가 기도를 해준 하남의 모 교회 목사도 결국은 세습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교회에서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다 주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런 목회자의 설교를 분별없이 듣다 보면 어느새 다 같이 '예수를 십자가에!' 라던 그때의 그 무리가 될 뿐이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예배를 잘 드리지 않아서, 성직자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단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 그러면서 드는 의문을 막연히 믿음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관련된 책과 정보를 찾아 알아보고, 많은 사람과 나누고 깨달아 자신의 신앙으로 쌓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40일간의 금식이나, 365일 새벽기도나 철야예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 책을 많이 읽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말씀도 글로 쓰인 것이라 텍스트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독서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로 쓰인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갓난아기에게 수유 후 이유식을 거쳐 밥을 주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독서량이 늘수록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도 커진다.
이처럼 성경을 본인이 직접 읽으려 노력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들으려고만 하는 것은 자기 전 부모에게 동화책만 읽어 달라는 것과 같다. 그럼 영원히 동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어리석음은 목사가 특수한 신분이라는 점을 강조해 성도들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젖병에 든 우유에 연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 우유를 타주는 목사의 권위에 종속하게 하여 영원히 이유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럼 평생 말씀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산해진미는 누리지 못하는 신앙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분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직접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해 전해 듣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에 의해 전해 들은 이야기는 처음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