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지구과학, 런던의 도시지질학
런던에 사는 원숙한 노부부 톰과 제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이 행복한 부부와 그들의 집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그로 인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 퇴직을 앞두고 삶의 기쁨을 찾지 못하는 톰의 친구 켄 등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의 외로움과 슬픔, 기쁨과 행복을 함께하는 벗이 되어 준다. 텃밭을 가꾸며 잔잔하게 살던 그들에게 소소한 인생의 변화가 사계절의 변화로 나뉘어 찾아온다.
런던에 사는 지질학자 톰(짐 브로드벤트 분)과 심리상담사 제리(러스 쉰 분) 부부의 삶은 완벽하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하나뿐인 아들도 변호사로 잘 키워냈다. 과년한 아들이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소소한 고민거리지만, 부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넉넉한 마음에 금슬도 좋아 모든 이에게 친절하다. 두 사람에겐 무엇보다 함께하는 식사가 중요하다. 그래서 영화의 많은 장면이 '톰과 제리'의 집 부엌에서 이루어진다. 이 영화는 후술 하겠지만 싱크대 사실주의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라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그들의 식탁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고집스럽게 영국 사회와 영국의 하층민들이 짊어진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아 온 마이크 리 감독은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를 통해 '동정심에는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흔한 것이다'라는 잔인한 삶의 진실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질학자는 해변에 가면 바다를 등지고 절벽을 쳐다봐
반면 지질학자 아내는 해변에 가면 절벽을 등지고 바다를 보고
대학시절 만나 무난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에 성공한 톰과 제리에게는 지질학적 배경들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두 사람에게는 톰의 호주 근무 기간 중의 추억과 이후 수개월에 걸쳐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의 귀국했는데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다름을 잘 알고 있다. 지질학자와 그의 아내는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을 이해한다.
약간 푼수기가 있는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레슬리 맨빌 분)는 결혼에 실패하고 셋집에 살며, 함께 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휴가 계획도 못 세우고 술만 마시지만, 부부는 그녀를 품어 준다. 그것도 20년째다. 술에 취해 부부의 집에서 자고 가고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 자기 이야기만 한다. 톰과 제리의 아들 조이가 새 여자친구 케이티를 데려오자 메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 이미 조이에게 추파를 던졌던 메리는 케이티에게 쌀쌀맞게 굴며 주위를 불편하게 만든다. 메리가 조카 뻘인 이들의 아들 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제리는 불편함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톰의 친구 켄은 모처럼 부부를 방문하여 은퇴를 앞두고 불안한 마음을 토로한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고 맥주만 마시는 그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다. 켄은 메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보지만 쌀쌀맞은 대꾸만 듣게 된다. 자기를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켄에겐 그 반응이 더 서럽다.
겨울이 되었다. 톰의 형 로니가 상처하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켄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반항적이고 막무가내다. 아슬아슬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부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로니를 잠시 자기들 집으로 와있게 한다. 부인을 잃고 가족도 해체된 로니는 톰과 제리의 행복한 가정을 강조하는 역할을 맡은 듯한 느낌이다.
영국 영화답게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고, 시니컬한 영국식 유머가 영화 전반에 걸쳐 어우러진다. 메리 역할을 연기한 레슬리 맨빌은 이 영화로 31회 런던 비평가 협회 영국여우주연상, 45회 전미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앤딩 신의 형식이 매우 보기 드문 영화다.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영국의 연극, 미술,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유행한 사조다. 중요한 장면이 부엌에서 진행되는 작품이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의 일종으로서 노동계급의 모습을 그리며, 낙태, 범죄, 노숙 같은 논쟁적인 사회정치적 쟁점들을 다룬다.
우리나라에서는 켄 로치(Ken Loach, 1936~) 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덜한 마이크 리(Mike Leigh, 1943~) 감독 역시 영국 사실주의 영화의 감독 중 한 명이다. 켄 로치가 비교적 전형적인 서사에 진중한 정치 참여적 영화를 만드는 편이라면, 마이크 리는 중심 플롯이 없는 비정치적인 에피소드 위주의 영화를 만든다.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들과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창의적 작업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같이 작업한 배우들이 각종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많이 받았다.
삶의 위트와 비극이 섞인 마이클 리의 초기작 <네이키드>(1993)는 갈 곳 없이 떠도는 부랑아 조니(데이비드 듈리스 분)를 따라가며 런던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런던 판 오디세이라 부를 만큼 배경 묘사가 뛰어나다(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베라 드레이크>(2004)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런던 뒷골목에서 벌어진 불법적인 낙태수술이 벌어지는 계급의 삶을 다룬다(칸 영화제 황금사자상).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는 덫에 걸린 임산부와 도덕적인 절망 속에서 시술을 하는 사람의 갈등 등이 복잡한 윤리적인 문제를 다룬다.
싱크대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가 있다.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2019),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2016), <나의 올드 오크>(2024), 마이클 윈터바텀의 <에브리데이 Everyday> (2012) 등이 있다.
영화 중에 톰이 현장을 방문에 시추기의 시추코어를 검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점토라고 OK 사인을 내린다. 중간에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며 현재 작업을 간단히 소개한다. 영화의 배경은 런던인데, 이곳에서는 점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런던의 지질은 크게 배사구조를 형성하는 분지에 고생대 지반암층 위에 소위 런던 점토라고 불리는 점토층과 백악(chalk) 층 등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위로는 신생대 에오세의 빙하성 또는 비빙하성 모래, 자갈 등으로 충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런던 분지는 6500만 년 전 백악기에는 따뜻한 바다였고 이때 백악이 퇴적되었다. 1500~2000만 년 전 알프스의 융기 시에 이 분지는 횡구조 작용을 받아 배사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런던의 북부인 칠턴 언덕(Chiltern Hills) 부근과 남쪽인 노스 다운스(North Downs) 인근에는 백악층이 지표에 노출된다. 중심부인 웨스터민스터 사원 근처에는 지하 70m 지점에 백악층이 위치한다.
런던 점토는 불수성이며 5600~3400만 년 전 신생대 에오세에 퇴적된 해양 퇴적물이다. 백악층 위에 놓이며 두께는 대체적으로 150m에 달한다. 점토의 존재는 런던의 건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터널을 뚫기 쉽고 질 좋은 벽돌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런던에는 벽돌 건물이 많다. 런던 지하철(London Underground)은 점토층에 건설됐는데 따라서 남쪽에는 지하노선이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한다.
런던분지는 프랑스와 연결되며, 영국의 동부 해안과 프랑스의 서부 해안에서 백악으로 이루어진 해식절벽이 잘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실 동일한 층서체계가 유럽 대륙 서부 전반에 걸쳐 존재하여 북부 독일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지질학적인 특징을 활용하여 런던과 파리를 연결하는 고속 기차인 유로스타의 유로터널은 Clay 층과 백악층 사이 말석(Marl) 층을 지나도록 건설됐다. 투수성이 낮고 균열이 없어 해저 터널을 설치하기에 좋은 지질학적 위치이다. 말석은 탄산염광물, 점토, 실트로 구성된 암석이다. 대체적으로 35~65%의 점토, 65~35%의 탄산염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양이나 담수 환경에서 형성된다. 말석은 도버 절벽의 하부를 구성한다.
영국 대도시인 런던에서는 지반침하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런던의 지질 특성 때문이다. 런던의 지반은 500만 년간 압축된 단단한 런던 점토로 돼 있다. 지반 자체가 매우 단단하고 압축돼 있어 상하수도관이 부식돼 물이 새더라도 토사가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신축 공사를 할 때 지질 조사를 먼저 하는 것이 의무화돼 있다. 영화에서 톰이 하는 일이 이러한 점토층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도시마다 도시의 경관을 좌우하는 것은 그 지역의 지질학적 환경이다. 파리가 파리다운 이유, 런던이 런던 다운 이유는 모두 그 도시가 위치한 지역의 석회암, 점토 등 지질학적 특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억 년에서 수백만 년 전의 환경이 오늘날의 도시를 만든 것이다. 우리의 삶도 과거에 우리가 만들었던 일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1. Katherine R. Royse, Mike de Freitas, William G. Burgess, John Cosgrove, Richard C. Ghail,
Phil Gibbard, Chris King, Ursula Lawrence, Rory N. Mortimore, Hugh Owen, Jackie Skipper, Geology of London, UK, Proceedings of the Geologists' Association, Volume 123, Issue 1, January 2012, Pages 22-45, https://doi.org/10.1016/j.pgeola.2011.07.005
2. 런던자연사학회, www.lnhs.org.uk
3. 헬렌 고든, 깊은 시간으로부터, 까치, 2023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