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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고 본만큼 가질 수 있다, 동해 무릉반석

문화유산 지구과학

by 전영식

동해시 무릉계곡은 명승 제37호로 지정된 멋진 곳이다. 단층이 만든 골짜기를 중심으로 무릉반석, 호암소, 선녀탕 등 다양한 화강암 지형이 있고, 삼화사의 문화제와 삼화사 수륙제 등 다채로운 불교 문화재가 있어 최근 찾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계곡에 들어서면 동해시의 이상한 교통 정체와 무릉계곡 진입로의 거대한 시멘트공장과는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 더욱 색다르다.


동해시는 1980년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시이다. 따라서 남북으로 묵호항과 동해항이 바닷가에 잇달아 있다. 해군 제1함대의 모항이고 7번 국도가 남북으로 지난다. 민선 이후 모든 시장이 구속되는 진기록을 갖은 도시다. 그래서 지금도 시장이 공석이다. 인터넷에서 남해섬만큼이나 제대로 검색하기 어려운 이름의 지역이다.


동해? 삼척?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에 삼척이 자기의 고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1274]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삼척군(三陟郡)에서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 조선시대의 관리가 한복이나 공복을 입을 때 두르던 띠)를 하사하였다. 이처럼 태조에 의한 삼척부로의 승격은 지방의 인구수, 토지 면적 등 합리 기준이 아니라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얼떨결에 이루어졌다.


삼척 공양왕묘, ⓒ 전영식

또한 삼척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것으로 알려진 묘가 있다. 반란의 씨앗을 뿌리 뽑으려 이리저리 옮기게 했다가 결국 삼척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이렇게 동해, 삼척은 한양에서 멀고 궁벽한 땅이지만 고려의 마지막과 조선의 시작이 겹쳐 있는 고장이다. 참고로 현재 공민왕의 묘는 삼척 외에 2개가 더 있다고 알려져 있다(경기 고양, 강원 고성).


당연히 태종대에 들어와 도제(道制)와 군현제의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면서 삼척의 읍격도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삼척 지역은 1413년(태종 13)에 삼척부에서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로 읍격이 강등되었다. 따라서 지방관도 종 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기 5년의 부사로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알만한 사람으로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 미수 허목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저암 유한준이 있다.


저암 유한준(著菴 兪漢雋)


유한준(1732년(영조 8) ~ 1811년(순조 11))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다. 기계(杞溪)가 본관이고 초명은 한경(漢炅). 자는 만청(曼倩) 또는 여성(汝成), 호는 저암(著菴) 또는 창애(蒼厓)다. 정치적으로는 노론이다. 1732년 음력 4월 7일 한양 옥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유언일(兪彦鎰, 1697년~1747년)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1758년)이다. 1748년 안취범(安取範)의 딸 순흥 안씨와 혼인했으며 1755년 장남 유만주(兪晩柱), 1759년에 차남인 유면주(兪冕柱)을 낳았다.



초명은 유한경(兪漢炅)으로 1768년(영조 44) 2월 22일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당시 생원 및 진사의 복시를 실시한 식년시에서 3등 60위로 급제했다. 1771년에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음직으로 경기도 여주의 영릉의 참봉으로 시작해 1794년(정조 18) 김포군수에 임명됐다. 1796년(정조 20) 삼척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811년(순조 11) 형조참의(정 3품 당상관, 참판 아래다)에 제수되었으나, 1811년에 사망하였다.


박지원과 동시대 문장가로서 쌍벽을 이루었다고도 하고, 젊은 시절에는 이래저래 친한 관계였으나, 이후 서로 경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론이었던 유한준은 박지원의 작품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혹평하였고, 실학자였던 박지원은 “유한준의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라며 논박하였다고 한다.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자저(自著)>, <저암집>이 남아있다. 그림에 대한 재능도 이야기되지만 그것을 입증할 증거는 없으며, 화우(畫友)들이 많았던 듯,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제발문(題跋文)을 심심하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석농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유한준의 발문이 실려있다.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


석농 김광국(1727(영조 3)~1797(정조 21))은 7대에 걸쳐 의관(醫官)을 지낸 중인 집안 출신으로 나이 21세에 의과에 합격하여 수의(首醫)까지 올랐고 나중에는 종 2품 가선대부을 받았다. 그리고 1776년 50세 때는 연행사신을 동행하여 중국에 다녀온 바 있다. 그때 아마도 우황을 비롯한 중국 의약품의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많은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1744년, 지본수묵담채, 28.7x42.0cm, 간송미술관 소장.


석농은 비록 중인계급이었지만 높은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고 그림을 볼 줄 아는 안목으로 10대부터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하였다. 부잣집 도령으로 그의 안목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현재 심사정의 ‘와룡암 소집도’에는 김광국(당시 18세) 자신이 쓴 다음과 같은 화제가 붙어 있다.


“갑자년(1744)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상고당 김광수(당시 56세)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때 현재 심사정(당시 38세)이 밖에서 허겁지겁 뛰어와서 옷이 다 젖었으므로 서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자 온 뜨락의 풍경이 마치 산수화 같았다. 현재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 바라보다가 ‘멋지다’라고 외치더니 급히 종이를 찾아 ‘와룡암 소집도’를 그렸다.”


김광국은 평생에 걸쳐 모은 그림으로 화첩을 꾸몄는데 이것이 <석농화원>이었다. 10권에 걸쳐 수록된 작품은 267폭에 이른다. 수록 화가를 보면 공민왕, 안견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단원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101명이다. 아울러 중국 그림이 37폭, 일본화 2폭, 유구 그림 1폭, 아라사(러시아) 그림 1폭이 있었고 네덜란드의 동판화도 한 점 들어 있다. <석농화원>에는 겸재 정선이 18점, 현재 심사정이 14점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 있었다. 아쉽게도 현재는 분해되어 낱장으로 흩어져있는데 소재를 모르는 작품도 있다.


<석농화원>에는 이 목록집은 발간을 위한 육필본으로 첫머리에는 박지원과 홍석주의 서문이 들어 있고 작품마다 석농이 지은 화평을 강세황, 이광사, 유한지, 박제가 등 당대 문인의 글씨를 받아 붙였다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정조시대 명사가 총망라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유한준의 발문이 들어있다.


유한준의 발문


愛卽爲眞知 知卽爲眞看 사랑하면 참을 알게 되고, 알면 참을 보이나니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이 보이나니

看卽蓄知而 非徒蓄也 보인다고 다 모으면, 그것은 모으는 것이 아니리.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가 있고, 사랑하는 자가 있고, 보는 자가 있고, 모으는 자가 있다. 장강의 상자를 꾸미고 왕에의 벽을 호사스럽게 만드는 것은 오직 모르기만 하는 자이므로, 반드시 잘 본다고 할 수 없다. 본다고 하더라도 어린애의 소견과 비슷하여 헤벌쭉 웃으며 그림밖에 다른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사랑한다 하더라도 붓과 종이와 색채만 보고 취하거나 형상과 위치만 보고 구하는 자는 반드시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아는 자는 형식과 법도는 접어두고 먼저 심오한 이치와 현묘한 조화 속에서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妙)는 저 세 가지의 겉모습에 달려있지 않고 아는 것에 달린 것이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이때 모으는 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

(원문 해석 발췌 유홍준, 김채식 옮김 『김광국의 석농화원』눌와, 2015)


이 글이 갑자기 유명해진 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이다. 우리나라 답사문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베스트셀러인 이 시리즈에 간략히 실린 이 발문(수록문장: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이 거의 책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석농화원>의 미술사적 위치와 함께 되살아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유홍준 교수도 정확한 출처와 저자를 몰랐는데,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후 다시 찾아내어 소개한 에피소드가 있다.


무릉계곡 무릉반석


봉래 양사언의 암각서, ⓒ 전영식


다시 동해 무릉계곡으로 돌아가 보자. 매표소에서 5분 남짓 삼화사 쪽으로 발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개울가에 1500평에 달하는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이 화강암 바위에는 엄청난 사람들의 글과 이름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들 암각서 중에는 조선 시대 명필 봉래 양사언의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 가장 알려져 있다.


저암 유한준의 암각서, ⓒ 전영식

길가 금란정에서 가장 잘 보이는 명당자리 너럭바위에는 큼지막한 이름 석자가 쓰여 있으니 유한준의 이름이다. 그는 여기뿐 아니라 상류인 용추폭포의 절벽에도 이름을 크게 새겨놓았다. 유한준은 1796년 7월에서 1798년 12월까지 척주(삼척) 부사를 지냈다.


용추폭포 유한준 석각, 출처: 불광미디어


판상절리


이때 무릉반석은 널찍한 중생대 불국사화강암의 일종인 삼화화강암에 생긴 판상절리이다. 판상절리는 모든 암석에서 잘 나타나는데, 특히 화강암 같이 땅 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심성암이 지표에 노출될 때 많이 나타난다. 판상절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위에 쌓인 암석들의 무게에 눌려 큰 압력을 받던 암석이 상부의 하중이 제거되면서 중력방향에 수평하게 나타난다. 적절한 환경에서는 암석이다 보니 식물들이 살기가 어렵고 계곡물이 흘러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되어 넓은 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생기면 사람들이 둘러앉아 소풍을 오거나 시화모임을 갖기도 하고 자연을 즐기는 장소로 각광을 받게 된다. 글씨깨나 쓰는 사람들에게는 도화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릉반석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좋은 자리에 새겨져 있다. 세검정이나 거창 수승대 등이 이와 유사하다.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은 유한준만이 아니다 ⓒ 전영식


판상절리는 말 그대로 위쪽부터 판상으로 암석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위의 유한준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 위쪽에도 떨어져 나가는 과정의 절리가 보인다. 암석에 새기는 것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말고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자연의 위력과 세월의 힘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동해 북평장은 1796(정조 20)년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오일장(3, 8일)이다. 북평민속시장 문화광장 무대에서 1796이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삼척읍지인 삼척진주지( 三陟眞珠誌)에 당시 한 달에 6번 장이 열렸고 삼척부사 유한준이 장세를 받았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장세를 받았다는 것은 난전으로부터 자릿세를 받았다는 의미이니 징세의 대상이 될 만큼 시장이 컸고 유한준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해시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부임당시 삼척부사 유한준은 무리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결국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이때 영리한 유한준은 주동자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내가 삼척부사로 올 때 쓴 돈을 이제야 거의 모았다. 내가 쫓겨나면 새 부사가 올 텐데 그도 큰돈을 쓰고 올 테니 또 세금을 많이 거둘 것이다. 내가 임기를 마치는 게 당신들에게 유리하지 않겠나?"라고 설득해서 무사히 부임기간을 마쳤다고 한다.


뭔가를 모아서 안목이 생기려면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한다. 서화집도 귀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없던 시절에는 더욱 그리했을 것이다. <석농화원>에 실린 멋진 발문이 나오게 된 원천은 삼척 백성들이 공헌한 바가 상당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제대로 된 시장이 아직도 안 나오는 동해시는 이런 명소에 이름을 새긴 유한준만큼 안목 있는 지도자를 언제 만날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문헌


1. 심경호, 내면기행, 이가서, 2009

2. 유홍준, 김채식 옮김, 김광국의 석농화원, 눌와, 2015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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