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지질학
석조 기념물을 찾아다니다 보면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작품들을 가끔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무늬가 짙을수록 글자는 잘 안 보이지만, 암석의 재질과 구조가 눈에 띄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된다. 비문도 중요하고 모시는 분도 훌륭한 분이시겠지만, 수백 년을 견디고 보존되는 돌에 그것도 특색 있는 돌에 새긴 덕분에 그 뜻이 오래 기억될 듯하다. 이 비를 준비한 후손들의 훌륭한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이번 소재인 저헌 이석형선생의 신도비*(樗軒 李石亨 神道碑)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다.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 선생의 묘소 앞 비각공원에 잘 모셔져 있다. 2000년 6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찾아가는 방법은 포은 정몽주 선생(1337~1392)의 묘를 찾아오면 된다. 맞다, 개성 선죽교에서 태종 이방언에게 죽임을 당한 고려 충신이 이곳에 묻혀있다. 그가 처가 묘지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또 다른 에피소드이다.
*신도비: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도(神道, 신령이 지나가는 길)인 무덤 남동쪽 지점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 비석. 묘 주인공의 삶을 기록한 비문을 새긴다. 조선초에는 종 2품 이상을 지닌 인물만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석형은 세종 23년(1441) 사마시(司馬試,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진다)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겼다. 이에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고 오히려 예조참의로 올렸다. 그 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개국 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저서로는 <대학연의 大學衍義>,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 21권, <저헌집 樗軒集> 등이 있다.
그의 묘는 포은 정몽주의 묘역 오른쪽에 있는데,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와의 합장묘이다. 부인은 포은의 증손녀이다. 저헌 선생의 장인인 정보 선생(포은의 손자)이 자기 묏자리로 정한 자리에 손녀가 죽자 먼저 장사 지냈고, 32년 뒤 이석형이 별세하자 합장했다. 묘역 안에는 묘비, 문인석, 향로석, 상석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원래 묘역 오른쪽 아래에는 사후 150여 년이 지난 인조 2년(1624)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조선시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워 주던 비)가 있었다. 포은 정몽주의 신도비도 묘역에 있지만 저헌 선생의 신도비에 미적으로는 못 미친다.
묘역 입구의 비각에 원수방부* 양식을 갖춘 신도비가 안치되어 있다. 원래는 묘 바로 아래에 있었으나 근래에 묘역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방부 위에, 하얀색 무늬가 가늘게 수 놓인 대리석 비신을 세워 놓았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0cm, 폭 95cm, 두께 23cm이다. 가첨석이 없는 비갈형이고, 심하게 풍화되어 있는 대좌에는 간결한 연화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당연히 왕의 신도비보다는 작지만, 꽤나 커다란 게 권위가 있어 보인다.
*원수방부(圓首方趺): 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
비신의 상단에는 이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한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쓴 전액(篆額)이 새겨져 있다. 김상용은 중국 당(唐)의 이양빙(李陽氷) 전서체(篆書體)에 매우 능하여, 당시 공사(公私) 간의 비석에 쓰여진 전액이 대부분 김상용의 작품이라고 한다.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豊德郡) 군수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 등이 알려져 있다. 병조호란 때 주화론을 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그의 동생이다.
비문은 저헌의 4대손 대제학, 판중추부사를 지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가 짓고, 외6대손이자 선조의 딸 정숙옹주의 남편인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이 글씨를 썼다. 건립연대는 1624년(인조 2)이다.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 공이 몰하였을 때 짧은 표석(短表)이 있어 다만 성명과 졸(卒)과 장(葬)을 기록하였을 뿐이며, 또 글씨가 흐려서 읽을 수 없었다. 이제 삼가 통문(通文)으로 여러 종족과 의논하여 다른 돌을 고쳐 세우기로 하고 이어 감히 공의 사적(事績)의 본말(本末)을 위와 같이 간략하게 쓴다. 그 세계(世系)와 이력의 상세한 것은 대비(大碑, 신도비) 안에 갖추어 실었으니 여기서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칠대손 통훈대부행청풍도호부사 희조근찬(七代孫通訓大夫行淸風都護府使喜朝謹撰)’ 으로 말미를 맺고 있어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활동한 17세기말부터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석은 결정질 석회암으로 보인다. 대리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석회암과 백운석(dolomite)이 접촉변성작용을 받아 재결정화된 조립질의 방해석 결정으로 되어 있다. 남한 지역에서는 충주-단양 지역에서 산출된다. 이 비석이 거기서 유래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태종 헌릉 신도비, 잠실 삼저도비가 유사한 재질로 되어 있다.
비석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검정선이 매우 경쾌하고 단정하다. 비석의 앞면에는 중간 부분에 습곡진 모습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비석의 상부에는 층리면을 따라 crack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향후에 떨어져 나갈 수 있어 보존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밖에 외형은 큰 파손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후면에는 앞면 같은 습곡형태의 무늬가 보이지 않는다.
정몽주의 묘소와 함께 이석형의 묘소도 풍수지리학적으로 뛰어난 위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석형의 집안은 이 묘지를 쓴 뒤 4대손부터 발복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안(延安) 이씨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인데, 문과급제 250명, 정승 8명, 대제학 8명(그중 월사 이정구, 아들 이명한, 손자 이일상은 3대가 대제학이었다), 청백리 7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인 자리와 좋은 비석이 함께 좋은 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풍수지리를 믿건 안 믿건 이왕 시간을 보내려면 기가 좋다는 장소를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43번 국도 능원리 부근이며 주차장이 잘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어 소박한 빵과 커피를 판다. 주말에 멀리 나가지 않고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만한 좋은 장소이다.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워낙 유명한 명당자리라 풍수공부하는 이들의 필수답사처라고 한다. 풍수가 그렇게도 좋지만 입장료는 없다.
참고문헌
1. 경기문화재단,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2. 문화재청,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3. 이춘오, 홍세선, 이병태, 윤현수, 국내 석재 산지의 지역별 분포유형과 특성, 한국암석학회지, 2006, 제15권 제3호, p. 154~166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