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국도 고암 IC를 나와 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서울지하철 1호선 덕계역을 지나게 되고 다시 도락산(439.5m) 쪽으로 1.8km를 가면 덕계신도브레뉴아파트와 신도어린이공원이 나온다. 그 뒤쪽 골목길을 살짝 오르면 야산에 송석 최명창 묘역(松石崔命昌墓域)이 있다(경기도기념물 제178호).
송석최명창 묘역 지도, 출처: 네이버
송석 최명창(1466~1536)의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여신(汝愼), 호는 송석(松石)이다. 할아버지는 최유(崔濡)이고, 아버지는 최철손(崔鐵孫, 병조참판 추증)이다. 집안은 고려말 이성계의 신임으로 성공했으나 이시애의 난 때 멸문의 위기에 처 했었다. 다행이 최명창의 성공으로 부흥된 듯하다. 최명창은 1489년(성종 20)에 진사, 1504년(연산군 10)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그 뒤 성균관전적·응교를 역임하였다. 1519년에 예조판서를 거쳐 뒤에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뒤 전주부윤과 원주목사를 역임했다.
관직에 있었을 때는 소신껏 건의하여 많이 채택되었으며,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검소한 장례를 당부하였고, 항상 집이 누추하여 친구의 방을 빌려 기거하였다고 한다. 선조들의 안좋은 기록들이 있어서 조심조심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는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청백리란 청귀(淸貴)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하여 오천(汚賤, 추하고 천한 것)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 즉 소극적 의미인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아닌 적극적 의미의 깨끗한 관리를 가리켰다. 조선시대 청백리는〈전고대방 典故大方〉에 219명, 〈청선고 淸選考〉에 186명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때 많이 선정 됐다.
송석 최명창 묘역 전경, ⓒ 전영식
송석 최명창 신도비 , ⓒ 전영식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에 최명창 신도비(너비 118㎝, 두께 18㎝, 높이 184㎝)가 자리하고 있는데, 누가 봐도 총알자국이 분명한 3개의 흠집이 나있다. 아마도 6.25 때 소행으로 보이는데 어느 편인지는 불분명하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황명 가정 십육년 정유 시월일(皇明嘉靖十六年丁酉十月日)’이라 써 놓아 1537년인 것을 알 수 있다.
송석 최명창 묘역 전경, ⓒ 전영식
30m쯤 계단을 올라가면 최명창(좌)과 부인 단양 우 씨의 동향 쌍분이 먼저 나온다. 묘지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설치되어 있다.
각자의 이수를 갖춘 묘비가 따로 있는데 송석의 비는 너비 47㎝, 두께 16㎝, 높이 75㎝, 부인의 비는 너비만 0.5cm 작다. 이수 뒷부분이 특이한데 최명창의 묘비의 경우 유운문(流雲紋)에 해를 조각하였고, 단양우 씨의 묘비는 유운문 속에 그믐달을 조각하여 놓음으로써 남편과 부인의 묘표에 양陽과 음陰을 묘사하여 놓은 것이다.
왼쪽 비석 앞면에는 ‘가선대부 예조 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공지묘(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副摠管崔公之墓)’라 새겼고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1537년(중종 32)이다. 오른쪽 비석 앞면에는 1520년(중종 15)에 졸卒한 부인인 ‘정부인 단양 우씨지묘(貞夫人端陽禹氏之墓)’라 새겼으며, 역시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1537년이다.
상석 앞 양쪽에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묘지 외곽에는 문인석이 한쌍 서있다. 묘소 위에는 최명창의 아버지 최철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동자석
사실 최명창의 묘는 16세기 조선의 묘제를 잘 보존하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그 구성품 중 동자석인 단연 눈에 띈다. 동자석은 묘지의 수호신으로 왕릉에는 쓰지 않고 사대부 묘소에만 사용됐다. 이 묘역의 동자석은 손에 꽃을 들고 고개를 묘소 앞쪽으로 돌려 배례자를 쳐다보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얼굴 부분은 마모되어 디테일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 경계하는 듯한 모습니다.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예술성이 높이 인정받는다. 높이는 88㎝이다.
송석 최명창 묘의 동자승, 묘지로부터 오른쪽과 왼쪽, ⓒ 전영식
동자승 예찬
유홍준은 그의 저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4>에서 최명창 묘의 동자승을 명품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그는 저서에서 "이 동자석은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아니라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역동적인 몸동작에 눈빛이 예리하다. 천의를 걸치고 손에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대단히 아름답고 조각적으로 우수한 능묘조각의 백미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이유가 원재료의 특이성에 있는 것은 모르는 눈치다.
암석에 대한 오해, 안타까움
두 개의 묘비와 향로석 그리고 동자석은 같은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육안으로 판단해 보건대 석영질 사암(arenite)으로 보이며 묘비에서 측면을 보면 층리가 뚜렷하다. 암석의 석영 입자가 거칠고 약해서 고결작용이 덜 진행된 암석으로 보인다. 장석류가 없기 때문에 화학적 풍화에 강하고 이끼류가 덜 생기기도 하며, 석영 자체가 흰색을 띠어 햇볕이 비췄을 경우에 내부에서 반사되는 은은한 빛이 있어 동자석이 매우 돋보이게 해 준다.석영의 작은 입자는 조각을 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때의 아름다움을 잘 보존하고 있다.
최철손의 묘비 측면, ⓒ 전영식
송석 최명창 묘의 향로, ⓒ 전영식
석영질 사암의 비석이나 석물은 좀처럼 보기 힘든데, 게다가 묘역이 위치하는 지역이 포천화강암이 분포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동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암석이다. 석영질 사암은 기질에 점토가 없는 사암으로 강변이나 해변과 같은 곳에 퇴적된다. 기원으로 분류하면 해성, 하성 육성사암으로 나뉜다. 이 암석은 암편을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정선이나 영월 쪽에서 채석하여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경우 당시 비석 재료의 선정, 유통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지질학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 의미도 크다고 하겠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이 동자석 등을 대리석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이 보인다. 석조문화재에서 암석의 종류를 구분하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암종이 조각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기본적인 교육만 받아도 알텐데 관심이 없어서 이런 인용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돌이라고 다 같은 돌이 아니다. 사용된 석재에도 많은 정보와 역사적 사실이 남아 있다. 우리가 무지해서 못읽어내는 정보가 많이 있다. 노벨상 수상은 이런 작은 것들이 쌓여서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