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종교적 상징물이 특정한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불비상은 돌을 비석같이 만들어 한 면이나 사면에 불상을 새기고 발원문을 새겨놓은 불상을 의미한다. 학자에 따라 상비, 비상, 불비, 조상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불비상은 원래 중국에서 남북조시대(386~589)부터 당나라 시기(618~907)까지 많이 제작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7개의 불비상이 발견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세종시 비암사(碑岩寺)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 국보 제161호)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 불비상은 높이 40cm, 너비 26.7cm, 옆면 너비 17cm의 납석 덩어리에 섬세하게 조각된 것으로, 불교문화재 중 아미타삼존의 존명이 가장 먼저 나온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전,후면), 출처: 국립청주박물관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촤측면,우측면), 출처: 국립청주박물관
네 면에 명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계유년(673)에 신라에 귀속한 50인이 국왕과 대신(大臣),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하여 아미타상, 관음상, 대세지상을 만든다는 전(全)씨 일가의 발원문이다.
불비상의 앞뒷면 조각상 옆 공간에는 발원문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계유년 4월에 전 씨를 비롯한 사람들이
국왕대신과 칠세부모를 비롯한 모든 중생을 위해
예를 갖추어 절을 짓고, 아미타불상과 관음.대세지상을 조성하였다"
금석문에는 신라와 백제의 관직 명칭이 모두 함께 나타나고 있어서 통일신라 초 문무왕(文武王) 대에 백제의 유민이 만든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국립청주박물관에는 세종시 지역에서 발견된 3개의 불비상도 함께 모아 전시하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은 T자 형태의 비석에 미륵반가사유상을 새겨 놓았다(높이 41cm, 너비 - 아래 15.5cm, 위 21.3cm, 두께 - 아래 11cm, 위 7.1cm). 돌의 형태가 배의 모습을 닮은 기축명아미타불비상(보물 제367호)은 기축년인 689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높이 57.5cm, 두께 8.5cm). 이 두 불비상역시 비암사에서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불비상 중 가장 큰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6호)은 높이 91㎝, 두께 14.5㎝, 너비 47.5㎝ 에 달해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에 2배 정도 된다. 계유년인 67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조치원읍내에 있던 것을 근처 서광암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920여개의 부처가 세겨져 있다. 아래부분돌로 받침대 역할을 하게 한 것이 특이한데 몸돌의 윗부분과 머릿돌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삼존불비상(보물 제742호)은 동국대학교서울캠퍼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납석 표면에 도금하였다. 중앙의 본존불 좌상은 높게 새기고 좌우에 협시(脇侍)한 보살입상은 조금 낮게 부조하였다(높이 32.5cm, 너비 20cm).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正安面) 평정리(平正里)에서 출토되었다.
나머지 2개는 세종시 조치원읍의 연화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하나는 무인명불비상(보물 제649호)으로 연꽃 대좌 위에 비석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함께 보관되어 있는 칠존불비상(보물 제650호)은 한 덩어리의 납석을 배모양으로 만들어 7명의 불상이 그려져 있다(높이 52.4cm).
삼존불비상, 무인명불비상, 칠존불비상(좌로부터), 출처: 국가유산포털
왜 세종시에만 나타날까
사실 이 불비상들이 왜 세종시(옛 연기군 지역) 지역에서만 출토되는지에 대한 시원한 답변은 없다. 불비상은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碑巖寺)와 연서면(옛 서면) 연화사(蓮花寺), 공주시 정안면 서광암(瑞光庵)에서 모두 7점이 발견되었다. 연화사 불비상들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쌍류리(雙流里) 절터(생천 사지, 生千寺址)
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비상들은 원래 이 사찰에 함께 봉안되었다가 흩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제작시점이 백제계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저항 운동이 끝나는 시점이고, 백제의 지도자들이 신라의 하급관등을 받았다는 점으로 보아 유민들이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미의 흔적이 서려있는 불비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의 발원문에 등장하는 전 씨에 대해서 보면, 온조의 남하시 온조를 따라온 백제의 개국십제공신 중에 전섭(全聶)이 있었다. 전섭의 29 세손인 전락(全樂)이 고려 개국공신(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서 희생함)으로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지며 천안 전 씨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시대가 좀 뜨지만, 천안과 세종시는 근처이고 일족이 근방에서 세력을 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 이름을 올린 전 씨도 그 사이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추론해 본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만든 불비상은 불교조각의 뛰어난 수준과 당시 불교신앙을 엿보게 해 준다. 각각의 불비상이 국보 2점, 보물 5점으로 지정되어 있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위에서 설명한 4개는 국립청주박물관에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납석
현존하는 7점의 불비상을 설명하는 글에서는 흑회색 납질편암이라고 설명되곤 하는데 실은 납석이다.
납석(agalmatolite, 蠟石)은곱돌이라고도 한다. 백색 또는 담갈색 등 여러 색상이 있으며, 치밀한 비결정질(非結晶質)의 표면은 파라핀 덩어리 같은(석랍, 石蠟) 촉감이 있다. 엽상규산염(필로실리케이트) 광물인 엽납석 (Pyrophyllite, 수산화알루미늄, (Al₂Si₄O₁₀(OH)₂))으로 구성된 암석이다. 주성분 광물의 종류에 따라서 엽납석질 납석(엽납석 ·석영 ·디아스포어 ·강옥 ·고령토 광물 ·견운모 등), 고령토질 납석(카올리나이트 ·디카이트 ·석영 ·디아스포어 ·베마이트 등), 견운모질 납석(견운모 ·석영 ·카올리나이트)으로 나뉜다.
엽납석은 응회암, 유문암, 안산암, 석영반암 및 각력암이 비교적 얕은 깊이에서 열수변질작용을 받아 형성되며, 열극, 층리면, 단층, 유동구조, 모암형태 및 열수용액의 성질에 따라 규제를 받아 형성된다. 도장용 재료(印材), 조각재, 석필 등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내화(耐火) 벽돌 ·내화 모르타르 ·용융 도가니 등 내화재, 타일이나 유약 등 도자기의 원료, 농약 등에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남서부지역인 전라남도 해남, 진도, 완도 지역과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인 경상남도 밀양, 김해, 동래, 양산 등에서 대부분 생산되고 있다. 세종 부근에는 현재 큰 납석 산지가 보고된 적은 없다. 납석으로 된 유명한 문화재로는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 보물, 출처: 국립중앙막물관
납석은 결정이 없고 마치 밀랍같이 연하기 때문에 조각하기에 적합한 소재이다. 따라서 시대를 불문하고 애용되는 소재이다.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물리적 자극에 취약해서 오래 보존할 소재는 아니다. 그리고 부드럽기 때문에 완성 이후에 덧작업을 해도 알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흔히 곱돌이라고 불리는 암석이 또 있는데, 이것은 전혀 다른 성인을 갖은 돌이다. 시중에서는 돌솥을 만들 때 쓰는 돌을 곱돌이라고 부른다. 이 검은 돌은 보통 각섬석과 사장석을 주성분으로 하는 변성암인 각섬암(角閃岩, Amphbolite)이다. 이렇듯 속명의 돌이름은 학문적 명칭과는 다른 경우가 매우 많아 일반인들이 헷갈리기 쉽다.
아직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불비상에 사용된 납석 암석 내지 불비상 자체를 중국에서 조각한 후에 들여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규격화된 돌을 사용하고 개별 불비상이 시대적인 차이가 나지만 상당히 유사한 디자인으로 동일한 공작 집단에서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납석의 성격상 완제품에 후에 발원문을 새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다른 암석처럼 납석도 산출지별로 각각 특징이 있다. 만일 불비상의 암석을 조사하여 그 출처를 밝혀 본다면 또 다른 역사의 맥락을 추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