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불은 신라말 고려초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왜 그때 나타났는지 속 시원한 설명은 아직 없다. 대표적인 이유로 호족과 선종의 발흥, 동(銅)의 공급부족, 중국유학파의 유입 등을 드는데 그렇다고 특정시기만 만들어지란 법은 없다. 분포도 전국적이 아니다. 주로 구산선문에 나타난다. 특히 수인은 지권인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비로자나불*이다. 소재, 크기, 보존된 위치 및 예술 양식의 특이성 등이 눈길을 끄는 매력만점의 문화유산이다.
*비로자나불: 온 세상에 존재하는 불법의 진리를 '광명(밝은 빛)'또는 '태양'으로 형상화한 부처,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며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협시한다.
장흥 보림사 철제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寶林寺)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장 먼저 생긴 사찰이다. 현재는 송광사의 말사다. 860년 신라 헌안왕(憲安王, 제위: 857~861)에게 권유를 받아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보조선사의 탑(보물 157호)과 탑비(보물 158호)가 존재한다. 법당 앞 삼층석탑에서 도굴꾼의 실패(1932) 덕분에 탑신부 사리장치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가 발견됐다. 탑을 조성한 때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귀 귀를 가진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10년(870)이라고 적혀 있다.
* 구산선문: 신라 말기 ~ 고려 초기까지 나타났던 선종의 주요 종파들. 서라벌에서 떨어진 지방의 산들에 9개의 사찰이 분포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구성은 장흥 보림사, 남원 실상사, 곡선 태안사, 강릉 굴산사, 창원 봉림사, 영월 흥녕사, 문경 봉암사, 보령 성주사, 해주 광조사이다.
보림사 대적광전 안에서 본 사찰마당, ⓒ 전영식
이 불상은 전체 높이가 273cm로 광배와 대좌는 없다. 나발이 뾰족하고 육계가 큼직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툼하다. 통견의 법의이고 가슴 앞에 V자로 모여 마무리되었다. 옷주름은 가벼운 천의 느낌을 살려 잘 느러지게 만들었다. 머리는 몸체에 비해 약간 크고 아래쪽으로 살짝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예배자와 딱 시선이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예배용 방석에 앉아서 우러러봐야 느낌이 온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전영식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왼쪽 팔뚝에 양각된 글자가 보인다. ⓒ 전영식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중요한 이유는 제작 시기(858년)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철불이기 때문이다. 유형문화유산은 제작 시점을 알면 거의 무조건 보물이 된다. 왼쪽 팔뚝에 조성 경위를 쓴 명문이 양각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情王(헌안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나는 평지 절을 좋아하는데, 사찰에 접근하기가 좋아서이다. 보림사도 그런 절이다. 이제는 찾는 사람 없어 쓸쓸하지만 절의 지리적 위치와 가람의 규모 등이 1급인데, 무슨 이유인지 불교계에서 홀대받는 느낌이 드는 절이다. 그래서 더 좋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안 남았다는 느낌이 든다. 파이팅 넘치는 젊은 경영자가 나타났고 각종 공사를 벌일 요량인지 각종 중장비를 시주받고 있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 고즈넉하던 산사가 망가지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이밖에 철원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도 등판에 8행(行) 139자(字)의 명문이 있어 조성한 시기는 865년 을유 정월로 밝혀졌다. 당연히 보물로 지정됐다(63호).
해남 은적사 철제비로자나불좌상
은적사(隱寂寺)는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있는 사찰로 대흥사의 말사이다. 해남군청에서 2.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중간에 금강산(488.3m)이 있어 상당히 외진 사찰이다. 원래는 다보사(多寶寺) 였던 것이 19세기초에 폐사된 후 은적암이 은적사로 이름이 바뀐 듯한데 기록이 없다.
하지만 원래 마산면은 금강산을 등지고 바다로 연결된 곳이었다.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육지 깊숙이 들어앉은 형상이 돼버렸다. 해남에서 간척지로 들어가면 당최 길을 찾을 수 없다. 언덕, 산도 없고 눈높이 이상 자란 풀이 간척지 둑을 덮고 있다. 갈 곳을 못 찾아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원인은 간척사업이었다.
해남군 은적사 지도, 왼쪽은 구 다보사 추정지, 출처: 네이버 지도
1989년 12월 한국농어촌공사가 농경지 조성 및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공유수면매립 인가를 받아 실시한 6천774만 9천㎡에 대한 영산강 3-2 지구 간척사업이 33년 만인 2023년 5월 완료됐고 토지대장에도 올라갔다. 이로서 해남군 토지 면적은 44만 3556필지 1045㎢(농지 358㎢)로 늘어났으며 전남 자치단체 중 최대 면적 자치단체를 유지했다. 이 면적은 강릉, 김천과 비슷한 넓이다. 두 번째로 큰 행정구역은 911.04㎢ 인 순천시이고, 가장 작은 행정구역은 목포시로 51.73㎢이다.
간척사업이 없었다면 지금의 마산면사무소 근처에 포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렇다면 인구도 몰려들었을 터이고 시장도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의 구심점 역할을 할 커다란 사찰도 필요했을 것인데 그 절이 아마도 다보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의 은적사 입구 쪽 300m 지점에 주춧돌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곳이 다보사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재견되었다고 한다.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
원래는 약사전에 있던 것을 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 비로전을 새로 지어 여기에 철조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높이 110cm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시기를 몰라 그간 국가문화유산에 지정되지 못했다가 드디어 2024년 7월 4일 보물 지정 예고되었다.
해남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전영식
광배는 없고 머리의 나발이 약한 편이고 육계가 불분명하다. 머리는 몸체에 비해 다소 적은 편이고 인상은 아무 표정이 없다. 양쪽 귓불은 길게 늘어져 거의 어깨에 닿을 지경이다. 법의는 통견이고, 법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는 평행한 띠 모양으로 매듭은 없다. 철불은 제작방법상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만들어 붙이는데, 이 철불은 그 접합 부위가 법의의 선과 일치한다. 매우 영리한 제작자의 손길이 거쳤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양식으로 본다.
해남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수권인이 다른 비로자나불상과 반대이다. ⓒ 전영식
비로자나불은 보통 왼손이 아래, 오른손이 위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 불상은 순서가 바뀌어 있다.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아쥐고 있다. 이런 비로자나불은 소수에 속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불국사와 광주 증심사의 비로자나불도 이와 같다.
해남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하체는 나무로 보수되어 있다. ⓒ 전영식
이 철조 비로자나불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1890년대 어느 날, 마산면 앞바다에 웬 불상이 하나 나타났다. 사람들이 이 불상을 보고 욕심이 생겨 서로 가져가려고 끌고당기고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은적사의 노승이 가서 공양을 하자 거짓말처럼 불상이 가볍게 들렸다. 불상은 오랫동안 바닷물에 잠겼던 탓에 허리 아래가 다 녹슬어 이후 목재조각으로 대체됐다. 자세히 보면 접합부 경계가 보인다.
답사 시에 다리의 표면처리가 진흙 조소상을 조각도로 밀어 놓은 듯이 보여 신기하게 오래 살펴보았다. 글을 준비하며 자료를 찾다 보니 위와 같은 전설이 있었고 하체는 목제로 복원됐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젠 보는 눈이 생겼다고 내심 웃었다.
은적사 심검이의 후임, ⓒ 전영식
은적사에는 ‘유명인사’가 하나 있었다. 매스컴에 많이 나온 오드아이 '심검이'었다. 진돗개와 시베리안허스키의 잡종으로 오른눈은 갈색이고, 왼눈은 파란색이다. 절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니, 걸걸한 목소리의 관계자가 이미 심검이는 하늘나라로 간지 10년이 넘었다고 알려주였다. 지금은 심검이 비슷한 하얀 개가 여전히 방문객을 반겨 맞고 있다. 늦었지만 극락왕생을 빈다.
만든 이와 내력을 새기려면 철불은 거푸집을 쓰기 때문에 양각을 해야 하고 목불은 음각을 해야 한다. 청동불이나 목불은 복장 유물을 남길 수 있으나, 철불은 배가 텅 비어 있다. 은적사 철불을 만들고 보수한 사람들은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온전한 부처가 중요하지 자신들의 이름이 뭐 중요하냐는 생각이었을까? 철불은 그 철의 기원, 제작방식의 지역적 유사성, 갑작스러운 제작의 중단 등 미스터리가 많다. 각 찰불의 시료를 구하여 첨단 분석기기를 통해 성분을 분석하면 실마리가 잡힐 듯하다. 하지만 그런 파괴적인 검사법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인문학적 추리만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철불을 보면 아득한 과거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