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화강암이 품은 마애불
우리나라 화강암은 크게 쥐라기 화강암, 백악기 화강암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것으로 쥐라기 화강암은 북한산, 도봉산을 들 수 있고, 백악기 화강암은 월악산, 속리산을 들 수 있다. 백악기 화강암은 불국사 화강암이라고도 불린다. 화강암은 마애불을 새기기 좋고 석탑의 재료로 쓰기 좋다. 그래서 멀리 화강암 산이 보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불교 문화재가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백악기 화강암인 속리산 화강암과 얽힌 불교 문화재 이야기다.
봉암사(鳳巖寺)는 경북 문경 가은면에 있다. 희양산(996.4m)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데 가려면 중부내륙 고속도로 문경새재 IC에서 나와야 한다. 3번 국도로는 문경시 마성면의 소야 삼거리에서 들어와야 한다. 이 사찰은 꽤나 가보기 어려운 곳으로 손꼽힌다. 1947년 청담, 성철, 자운 등 승려가 봉암결사를 일으킨 뒤, 초파일 단 하루만 선문을 개방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인연으로는 평상시에 방문이 불가능하다. 혹시 절에 큰 기부를 하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루만 오픈이라 길은 수 km전에서부터 막히고 법당 마당엔 연등이 가득하여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구경이다.
워낙 유서 깊은 사찰이고 방문이 어려운 곳이라 작심하고 가야만 하는 곳이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선승 도헌이 창건했다. 통일 신라 말 선종의 일파인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선문(曦陽山門)의 종찰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비>에는 창건 이야기가 나와 있다. 땅은 본래 심충이란 사람의 것이었는데 도헌을 찾아와 선사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현장 답사를 한 도헌은 “이런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 구산선문에는 철불이 함께 만들어지는데 봉암사에는 기록만 있을 뿐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직지사의 말사다.
봉암사에는 개창자인 도헌국사, 즉 지증대사의 탑비(智證大師)가 있는데 고미술적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비문을 최치원이 썼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 대숭복사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를 지어 이 비까지 사산비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5점의 보물* 과 지방문화재가 있어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 정진대사원오탑, 정진대사원오탑비, 지증대사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삼층석탑
희양산(曦陽山)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북쪽 사면을 제외하면 암벽으로 이루어진 암산이다. 지질도에 나타난 암석은 경상계 불국사층군 흑운모화강암이다. 즉 9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화강암이다. 이는 산의 모습과 입구 강변에 나타난 판상절리 암석에 잘 나타나 있다.
봉암사를 우측에 끼고 계곡을 10분쯤 올라가면 백운계곡이 나온다. 넓은 화강암 덩어리 한쪽 편에 높이 4.5m의 바위가 있는데 산에 붙어 있는 노두는 아니고 굴러 떨어진 암석이다. 바위 면을 다듬고 불상이 들어갈 감실을 만들었다. 광배는 선각으로 표현했다.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는 낮고 얼굴은 갸름한데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양각했다. 눈두덩이 뚜렷하고 가느다란 눈과 어울려 스마트한 느낌이다. 귀와 코는 큼직하고 입술은 단정하다.
삼도 역시 가지런히 새겨져 있어 석공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어깨를 감싸는 통견의 법의이고 띠 매듭이 가슴에 있다. 오른손은 연꽃을 들고 있고 왼손은 이를 받치고 있다. 감실 밖으로 뻗어 나온 연꽃의 조각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연꽃 대좌는 물가여서 그런지 마멸이 심하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경북지방문화재이다.
백운대는 대략 200여 평 되는 화강암 바위이다. 이 위를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마애불이 위치한 평면 아래로는 폭포와 소가 있다. 따라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마애불에는 언제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많은 신도들이 동전 붙이기를 시도하고 있다. 화강암 마애불이 있는 곳에선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흑운모와 장석이 풍화되어 떨어져 나가고 석영만 잔류하고 있어 동전 밑을 바쳐준다. 동전이 잘 안 붙으면 소원이 안 이루어진다고 생각 말고 암석이 화강암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으면 좋겠다.
문경에서 서울 쪽으로 오다 보면 연풍 I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 국도는 갈린다. 조령을 넘나드는 3번 국도 아래 지방도 변에 있다. 연풍 시내에서 차로 5분이면 갈 수 있다. 사실 연풍에서는 수옥폭포가 더 유명해서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院豊里 磨崖二佛並坐像)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두 분의 부처를 세긴 고려시대 마애불로 보물로 지정된 불상이다. 보려면 국도에서 일부러 길을 갈아타야 한다.
도로변에서 올라가면 높이가 대략 12m 정도 되는 암벽이 나오고 여기의 윗부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감실을 파서 공간을 만들고 깊숙하게 파내어 양각으로 부처를 새겼다. 조금 심하게 깊이 판 것으로 보아 암질 때문에 만들 때 고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얼굴과 어깨 쪽은 깊숙이 파여 마멸이 덜 한데 하부는 마멸이 심하다. 감실 바깥쪽은 조류와 이끼가 자라고 있어 검은색을 띠고 있다.
좌불 머리 주위에는 각각 5개의 화불을 새겨 넣었다.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잎으로 표현했다. 두 불상은 어깨가 넓고 떡 벌어져 있는데 팔뚝도 두꺼워 압도하는 분위기이다. 입체감은 떨어지며 다소 형식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산길에서 여행객의 봇짐을 노리는 산적을 감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나는 듯하다. u자형 통견의가 선각으로 배까지 내려와 있다. 꽤 오래전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두 여래는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주변 암석을 살펴보니 정동(晶洞, druse)이 많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정동은 모암이 식어서 암석이 될 때 남은 공간이 생기고 여기에 잔류 유체에서 결정체들이 성장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에서 잘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기에 SiO2 성분이 많은 유체가 결정화되면 육각형의 길쭉한 석영 결정이 아름답게 나타난다. 화강암이 만들어진 깊이가 낮은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에 상대적으로 많이 보인다. 이불병좌상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아 정동과 암맥이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런 구조는 문화재의 보존에 악영향을 미친다.
추측컨데 마애불을 새기기 위해서는 먼저 쓸 만한 크기의 암석이 있는 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마애불이 들어갈 면을 만들었을 것인데 깎아 내다보면 정동이나 암맥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나중에 그 부분이 떨어져 나오게 되니 아마도 더욱 깊이 깎았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처럼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한계 속에서 암벽을 선정하고 마애불을 세긴 석공의 갈등, 고민 그리고 결심이 느껴진다.
참고문헌
1. 최복일, 2019, 한국의 마애불, 달아실
2. 유동후, 2014,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행, 토파즈
3. 문명대, 1991, 마애불, 대원사
4. 대한지질학회, 1998, 한국의 지질, 시그마프레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