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산과 바위의 지역이다. 가야산과 덕유산이 위치하여 천 미터가 넘는 산이 부지기수다. 수승대 등 정자도 바위가 좋은 곳에 있다. 수승대는 지역에서 매우 유명한 관광지이고 그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불법 낙서가 가득한데, 바위의 평평 곳에는 빈틈이 없이 글이 쓰여 있다. 하긴 바위가 좋지 않은 곳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거창 수승대
거창 바위 중에서 또 유명한 곳은 문바위이다. 금원산 기슭에 있는 문바위는 근처에 가섭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거기에 국보로 지정된 마애삼존불이 있다. 가섭암(迦葉岩)이라는 명칭은 통영 안정사, 공주 마곡사에도 있다. 하지만 거창의 가섭암은 고려시대의 마애불로서 그리고 조선시대의 산수화로서 만나볼 수 있어 매우 의미 깊다.
김윤겸 <가섭암도>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은 문인화가인 안동 김 씨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서자였다. 김창업은 척화파인 김상헌(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윤석이 배역을 맡았다)의 고손자이다. 잘 나가는 명문 사대부 집안을 들락날락하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겸재는 김윤겸의 백부인 김창집의 천거로 20세에 도화서에 들어갔다. 아마도 김윤겸은 겸재의 각별한 지도를 받았을 듯하다. 겸재 일파로 구분된다. 그림에 정선의 진경산수 풍이 스며 있어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담담하게 그렸다. 진재의 둘째 아들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친했다고 한다. 진재는 이런 시대를 살았던 문인화가이다.
김윤겸은 1765년(영조 41)에 지금의 진주 문산 IC 인근인 소촌도 찰방(역참을 관리하는 종 6품 외관직,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23명의 찰방이 있었다.)에 임명되어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부산 등 영남지역 명승지를 유람했다. 이때 그림을 그려 화첩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인 <영남명승첩 嶺南名勝帖>(보물1929호)이다. 김윤겸의 후기 작품이다. 종이에 먹과 색채를 은은히 사용하여 맑고 산뜻하게 그려냈다. 화첩에 실려진 장소는 진경산수에 등장하지 않던 지역의 명승이어서 의미가 크다.
<영남명승첩>에는 14장의 그림이 있는데, 거창 지역은 월연, 송대, 순암, 가섭암, 가섭동폭의 5폭의 그림이 실려 있다. 가섭암은 주문 방인(글자 부분이 붉게 찍히는 인장)이 없는 5개의 그림 중 하나이다. 좌측 상부에서 우측 하부로 이어지는 구도의 그림으로 북쪽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시각으로 그려졌다. 좌측 상부에는 가섭암이 보이고 그림 하단부에 마애삼존불이 새겨져 있는 암석이 보인다. 소나무는 미점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오른쪽 상부 공간을 과감히 비워 가섭암을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였다. 모든 공간을 채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된다. 바위는 굵은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먹으로 농담을 주어 입체감이 살아나게 표현하였다.
김윤겸, <가섭암>, 1770년대 초, 종이에 엷은 색, 30.0x21.1cm,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보물 제1929호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바위 그리고 마애삼존불
거창 신북읍 산천리의 금원산(1,352m)과 현성산(965m) 사이 골짜기에는 현성산 쪽에서 굴러 내린 바위들을 만날 수 있다(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분명하다). 금원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에서 460m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문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 단일 바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높이가 족히 30m는 넘을 바위가 절리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당당히 서 있다. 문바위가 일주문 역할을 하여 문바위 북쪽 산기슭에 가섭암지가 있고 암자 터 위쪽에 바위들 사이 공간 안쪽에 마애삼존불상(보물 제530호)이 있다.
문바위
마애불은 바위 한 면을 보주형으로 파서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얇게 삼존불입상으로 만들었다. 본존불은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불이며 좌우협시불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본존불은 철(凸) 자 모양의 대좌 위에 서 있고,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정수리의 육계는 비교적 크게 솟아 있다. 넙적한 얼굴에 볼록한 뺨, 삼각형의 코, 작은 입과 눈, 커다란 귀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몸이 붙어 있어 삼도를 그릴 공간이 없다. 각진 어깨, 전형적인 U자형 법의의 주름, 로봇 같은 다리, 바깥으로 향한 양발의 모습 등이 그저 형식적인 느낌을 준다. 협시불도 도식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삼존불
높이는 본존불이 115cm이며 대좌와 두광을 포함하면 215cm에 이른다. 협시불은 좌 154cm, 우 150cm로 좌협시불이 약간 작다.
본존불 좌측 협시불 옆에는 불상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1989년 동국대학교 조사에 따르면 효심이 극진한 고려 예종이 모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 1111년(예종 6년)에 조성했다고 하는데, 마모가 심해 읽기 어렵다. 왜 개성에서 먼 이곳에 모친을 추모하는 형식적인 마애불을 새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섭암지 마애불상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고려 마애불로서 불상의 편년을 정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편년을 알면 불상의 형태, 제작 기법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매우 중요하다.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마애불 중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이천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진천 태화4년명 마애불, 원주 소초면 흥양리 마애불,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 홍성 용봉사 마애불, 경주 남산 윤을곡 마애불, 함안 방어산 마애삼존불 등이 그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 마치 지층으로 서로 간의 시대를 구분하듯 불상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섭암은 김윤겸의 그림에는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거창의 석재산업
거창군 홈페이지를 보면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눈에 띄는 산업은 엘리베이터 산업이 나와 있다. 국내 유일의 승강기 대학이 있고 승강기 산업 클러스터가 있다. 하지만 거창 주변을 다니다 보면 화강암 석재 공장과 석재 원석을 실은 트럭을 쉽게 볼 수 있다. 위천면 남산 농공단지에는 석재 가공업체가 몰려 있다. 거창의 화강암은 포천, 익산과 더불어 국내 3대 채석단지 중의 하나이다. 석재는 2014년 자료에 따르면 연간 매출 규모는 1,500억 원으로 군 전체 산업생산의 25%를 차지한다. 종사하는 인원은 2천 명 정도로 군 인구의 15%를 차지한다. 7개 업체가 연간 305만 톤의 석재를 생산하는데 국내 화강석 생산의 20%를 차지한다.
거창군 남산 농공단지, 출처:네이버 로드뷰
거창 화강암은 중생대 백악기 흑운모 화강암으로 국내 생산 화강석 석재 중에서 가장 밝은 색을 띤다. 이는 철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철망간 광물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물과 공기에 노출되었을 때 녹의 발생이 적어 외관이 깨끗하게 유지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석산에 따른 품질의 차이가 적어 균질한 외관의 석재를 이용하기에 편리하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거창은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경관자원이 풍부하고 유명한 관광명소가 산재해 있다. 예부터 이러한 특징이 오늘날의 거창 문화와 산업을 잉태하게 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하였던 지역이지만 이제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훨씬 접근성이 좋아졌다. 암석 자원은 거창에는 발전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창군 주상면 일대 위성사진, 도로 옆 흰색 부분이 화강암 채석장이다. 출처 : 네이버 지도
하지만 홈페이지에는 석재산업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석재산업이 3D 사업으로 인식되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굴레가 씌워져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석재산업 역시 어엿한 산업이고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산업재이자 소비재인데 자랑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인다. 감추고 쉬쉬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이제는 주요 산업에 맞는 합리적인 대접을 하고 공개해야 더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산업으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1. 거창화강석연구센터, granite.re.kr 2.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강산을 그리다, 2019 3. 박영대, 우리 그림 백 가지, 2002, 현암사 4. 유동후, 마애불을 찾아가는 여행, 2014, 토파즈 5.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2010, 생각의 나무 6. 최복일, 한국의 마애불, 2019, 달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