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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27. 2022

진주성과 사천 왜성의 지질학

경상분지 사암으로 만든 성 이야기 


어쨌든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16세기 동북아 지역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이었다. 일본은 13만여 명(일본군 합동참모본부, 1924), 조선 민관 합계 최대 100만 명, 명나라 최소 약 3만 명으로 대략적으로 116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아주 대략적인 한국 전쟁 총사상자(남, 북, 연합군, 중국)가 110만 명정도인 것을 보면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가늠이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이후 왜와 중국에는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16세기 동북아 세계대전으로 일컬을 수 있는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과정에서 지질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색다른 관점일 수도 있다. 이중 진주성과 사천 왜성을 살펴보자 


진주성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변에 위치한 진주성은 승리와 패배, 충절을 담은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고려 1379년(우왕 5년)에 기존 토성에 석축을 쌓았다. 내성의 둘레는 1.7km이고 임진왜란 전인 1591년 4km의 외성을 증축했다.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10월 5~10일, 3,500명의 군사로 왜적 3만여 명을 물리친 진주대첩으로 역사에 남았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왜의 피해는 지휘관 3백 명, 병사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왜 육군은 이런 정도의 피해는 입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게 된다. 그 후 평양까지 진군한 왜는 명군의 참전에 따라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패배하게 되고 전선은 남하하게 된다. 6월 21~29일 2차 진주성 싸움이 일어났다. 왜는 협상의 유리한 입장을 얻고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거의 왜군 전병력인 9만 3천여 명을 끌어 모아 공격하여 6~7만여 명의 민관군이 전멸시켰다. 사실 왜군이 성내의 모든 사람을 학살했기 때문에 몇 명이 죽었는지 우리 측에는 자료가 불확실하다. 일본군도 3만 8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2차 진주성 싸움의 폐인은 여러 가지가 이야기되고 있으나, 지도부의 의견 분열, 지휘관층의 사망, 외부 대응의 부재, 장맛비에 따른 지반 약화 등이 이야기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왜는 귀갑차(龜甲車)를 타고 성벽에 접근해 폭파시켜 무너뜨렸다고 한다. 왜군은 계속되는 장맛비로 조총을 쏘지 못하고 지루한 공방전을 이어 갔다. 왜군에는 조총은 있지만 성공격에 필수적인 화포는 빈약했다. 당시 왜군이 이순신의 조선 해군에 연패를 당한 이유도 화포가 빈약했고 배를 붙인 후 올라타서 백병전을 하는 해적 같은 전술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왜군이 명군처럼 화포가 있었다면 화강암이 아닌 사암으로 된 진주성은 더 빨리 함락됐을지도 모른다. 

 

남강 건너 남가람공원 대숲에서 바라본 진주성


진주성은 남강변에 기울어진 지층 위에 서있다. 약 10도 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진 이 지층을 지질학에서는 진주층이라 한다. 촉성루도 진주층 위에 서 있고 의암도 진주층의 사암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은 현재의 크기보다 2배 이상 컸었다. 동으로는 현재의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북으로는 유등시장 근처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근대에는 1925년까지 성내에 경상남도 도청이 위치해 있었다. 성내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은 유적과 어울리지 않고 박물관으로서 접근성, 확장성이 좋지 않아 2026년을 목표로 구 진주역 부지로 이전할 계획이다.

진주성 공북부 안쪽 모습, 성문은 밝은 색 화강암, 성곽은 검은색 사암으로 쌓여 있다.


조선시대 진주성 규모와 모양의 변화, 출처: 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진주성도>


진주성을 축성했을 때 쓴 돌에 대한 출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막연히 추측해 본다면 일단 이동의 거리를 줄이는게 필요하기 때문에 성의 동측 선학산(137.4m)에서 채석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선학산은 뒤벼리 절벽이 있어 암석의 종류 및 채석에 대해 판단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아니면 망진산(178.6m) 상류에서 채석한 후 남강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강에서 절벽 위까지 날라야 하는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진주성 남쪽 성곽, 검회색 사암 블록으로 쌓여 있다.


사천 왜성 전투


왜성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때 우리나라 남해안 등에 왜가 보급로 확보와 주둔 기지를 목적으로 쌓은 성을 말한다. 왜는 1592년 가덕, 웅천, 영등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593년에는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공포, 거제도 등에 성을 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는 울산, 양산, 창원, 거제, 고성, 사천, 남해, 순천의 8개를 신규로 축성하였다.


지금은 선진리성이라고 부르는 사천 왜성은 진주성의 남서쪽에 있고 직선거리로 16.6km 떨어진 해안가에 있다. 원래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같은 곳이었으나 오늘날은 매립되어 옛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사천 왜성은 1597년 겨울 축성되었다. 동쪽만 육지로 통하고 나머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혹자는 지금은 별장 짓기 좋은 위치라고 평한다. 동쪽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인 해자를 만들었다. 사면이 접근하기 힘든 구조다. 천수각이 있었던 곳에는 현재 ‘항공전몰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정방형으로 각 변은 대략 500m 정도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은 1차 패배를 맛본 후 2차 본진으로 이여송(할아버지가 조선인이다)을 사령관으로 1592년 12월 22일 압록강을 건넜다. 4~5만 병력이었다. 명군은 ‘불랑기포’라는 서양 대포를 이용 평양성(근처의 지질을 보면 퇴적암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다. 이후 명의 공격은 화포 중심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화약은 지금도 관리가 까다로운 물건이다. 습기에는 더욱 취약하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금도 재고로 남은 포탄, 총알을 정기적으로 소진시키는 훈련을 한다. 


패가 꼬인 왜는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으며 조명연합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1597년 5년간의 지루한 협상이 결렬되자 왜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는데 삼군수군통제사 원균을 칠천량에서 이겨 기세를 잡았지만 천안 직산에서 명군에게 저지당하게 되었다. 다시 이순신에게 대패를 당한 후 왜성에 틀어박혀 수성전을 이어갔다. 1598년 1월 울산성에서 실패한 조명연합군은 왜성 간의 연결을 끊고 바다를 막는 ‘사로병진’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때 목표가 된 곳이 울산, 사천, 순천의 왜성이다. 


1598년 10월 1일 조명 연합군이 사천을 공격하였다. 명나라의 동일원 장군과 조선의 정기룡 장군이 이곳을 담당한 중로군을 맡았다. 명군은 2만 6,800여 명, 조선군은 2,215명 등 총 2만 9,015명이었다.  그런데 마치 영화같이 명나라군의 어이없는 실수로 대포부대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이틈을 노린 왜군의 공격으로 대패하였다. 대부분이 명군인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선조실록>에는 7~8천, 일본 측 <도진중흥기>에는 38,171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근처에 이때 사망자를 묻은 ‘조명군총’이 있다. 


폭발사고가 없었다면 화포로 무장한 명군은 쉽게 사천 왜성을 공격했을 것이다. 이때까지 왜는 화포에 대응하는 축성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천 왜성 전투는 벽제관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에서 명군의 양대 패전으로 꼽힌다. 게다가 일본에 남아 있는 성곽은 개보수로 축성시기와 방법을 구별하기 어려운데 왜성은 정유재란 이후 개축되지 않고 남아 있어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인들은 아직도 왜성을 찾아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7월 7일 죽자 일본 정국은 혼미 해졌다. 후계 권력 장악을 위해 각 세력은 자기 병력을 철수시키게 된다. 결국 11월 18일 사천 왜성의 왜군은 철수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순신에게 공격당해 300여 척의 함선 중 2/3을 잃고 패퇴하게 된다. 이 전투가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이다. 이때 이순신은 목숨을 잃었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일대의 왜성, (이형재)


사천 왜성 (선진리성)


일제 강점기 때 고적으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1998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격하되었다. 강점기에 총독부가 이곳을 전승기념 공원으로 조성하고 1천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는데 아직도 봄이면 하염없이 꽃을 피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1597년 모리 요시나라(毛利吉成)가 퇴군의 거점으로 급히 축성한 것으로 다음 해 시마쯔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주둔하였다. 


사천 왜성은 높이 33m의 야트막한 구릉지에 축조되었다. 현재는 간척지 매립으로 주변이 육지가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서쪽, 남쪽, 북쪽이 바다에 면에 있고 동쪽만 육지에 면했다. 남으로 길게 뻗은 곶은 선박을 정박할 수 있는 호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과거 고려의 토성이 있었던 곳이라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사천 왜성 내부, 성벽이 기울기를 가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왜성 유구는 동서 약 250m, 남북 200m 정도이며 본곽 일부와 장대, 문지 등이 정비 사업을 통하여 복원되어 있다. 본곽에서 남측으로는 석성이 지어진 흔적이 나타나고 있고 앞쪽 광장에서 올라가는  등성로가 있다. 남측으로 재방을 세우기 전에는 성의 중앙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에서 채집한 자연석(사질암, 퇴적암)과 절단 면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석재의 대부분은 부피 0.4㎥ 규모로 다듬어 사용하였으며, 성의 규모는 다른 왜성에 비하여 적은 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체의 높이는 2.4m 정도인데, 천공하여 절단한 석재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성은 우리 성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우리는 백성 들과 함께 사는 구조다. 일본은 군주만 산다. 둘째 일본 성은 우리 성이 경사가 거의 수직인데 반해 성벽의 경사가 비교적 약하다 60~70도 정도이다. 이는 지진이 심한 일본의 특성상 기초부위가 넓어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 번의 왜란은 우리나라의 축성 방법뿐만 아니라 왜의 축성방법에도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성은 조선에서의 실전 경험을 녹여 쌓은 것이다. 


사천 왜성의 사암 성벽의 모습


경상분지와 진주층


진주성과 사천 왜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지층은 동일한 경상계 신동층군 진주층이다. 진주층은 중생대 백악기 셰일, 사암, 이암이다. 진주층은 1910년 일본인 지질하자 다테이와(立岩)에 의해 제안되었다. 대구-왜관-영천-경주지역 지질도를 작성하면서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과 셰일이 교대로 싸인 지층을 진주층이라 명명하였다. 보통 지층의 이름은 그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의 지명을 딴다. 이를 표식지라고 하고 진주층의 표식지는 진주 뒤벼리 절벽이다.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선학산의 남쪽 남강변 절벽인데 왕복 6차선 도로가 나 있다. 지금은 낙석방지 철망이 시설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진주층의 두께는 진주지역에서 1,000m 정도이다.


지질학에서는 층을 모아 층군이라고 부른다. 진주층은 신동층군에 속한다. 신동층군은 아래에서부터 낙동층, 하산동층, 진주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층군은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진 일정한 두께의 지층을 일컬어 ‘ㅇㅇ층’이라고 한다. 같은 조건이란 퇴적 조건, 분출 조건 등이다. 가령 퇴적되는 호수나 바다의 물의 유속이 일정하고 운반 물질이 같으면 이 결과 만들어진 층을 다른 환경에서 형성된 층과 구분하여 ‘ㅇㅇ층’이라 구분하는 것이다. 즉 퇴적 조건이 같은 암석 단위를 말한다.


진주층은 경상계의 일부이다. 경상계는 백악기에 쌓인 일련의 퇴적층군을 의미한다. 중생대 백악기에 동북아의 판의 운동은 전기~중기(110~85Ma) 사이 이자나기판이 해구에서 사각 섭입을 하였고 쿨라/태평양 해령의 해구 도달 이후, 즉 85Ma이후부터 백악기 말끼지 해구에 직각으로 섭입 되었다고 연구되었다. 따라서 85Ma 이전에는 소규모의 좌수향 인리형 분지(영동분지 등)가 발달하였고, 85Ma 이후에는 후퇴성 정단층작용으로 대규모 분지가 발달하게 되는데 이게 경상분지이다. 진주층이 있는 신동층군은 가장 먼저 쌓인 퇴적암 지층군이다. 최초에는 하성퇴적물이 퇴적되었는데 충적선상지를 이루었다. 시간이 지나며 분지가 확대되면서 호수퇴적물층인 진주층이 쌓이게 된다. 화장의 주원인은 구조 운동보다 강수량의 증가였다고 해석된다.


경상계 진주층의 사암은 다루기 쉬운 암석이다. 강도가 약하고 층을 이루기 때문에 채석도 쉽고 가공도 빨리 할 수 있다. 진주, 사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사암을 이용한 진주성은 1차 대첩 후 빠르게 성을 복구할 수 있었고 10일간의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왜군도 빠른 시간 안에 왜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순천 왜성의 경우 3개월 만에 완성됐다). 사암성인 두 성은 화포 시대에 마지막을 장식한 성이었다. 암석은 재료일 뿐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재료를 활용하여 다른 결과를 얻었다면 너무 나간 이야기일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질자원을 다르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도 그렇겠다.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한국지질 다양성 서부경남편

2.     김영식, 2021, 일본 근세성곽과 왜성의 이해, 어문학사

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4.     서승조, 2008, 진주의 지질과 화석, 지식산업사

5.     이장희·성대경·신해순, 1989,「임진왜란시 사천전투와 그 전적지 조사」, 『군사』19,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6.     이형재, 2009, 한국 남해안 왜성 건축술 연구,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7.     대한지질학회, 1998, 한국의 지질, 시그마프레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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