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이나 호남지방에 가면 경치 좋은 곳에는 항상 무언가 있다. 카페, 백숙집이나 가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亭)자는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만든 건축물을 말한다. 누(樓)는 정보다 크고 보통 2층이다. 각(閣)은 누의 형태지만 사방을 향하여 열린 형태를 지칭한다. 누와 각을 합쳐 누각이라고 부르고누각과 정자를 합쳐 누정이라고 부른다. 누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樓) · 정(亭) · 당(堂) · 대(臺) · 각(閣) · 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그 후 섞여서 사용되게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지역별 누정의 분포는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70개), 평안도(100개) 순이다.
누정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 위주의 유람이나 휴식 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사랑방을 경치 좋은 곳에 배치한 것으로 보면 된다. 개인 시설은 정, 사찰이나 향교 등에는 누로 쓴 것이 많다.
김천 방초정(芳草亭)
방초정, ⓒ 전영식
3번 국도로 김천에서 거창으로 가다 보면 김천시 구성면 구성초등학교 입구에 멋진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방초정이다. 영남지방의 정자에서는 보기 힘들게 이층의 정자 가운데 방을 만들고 일층에는 온돌을 설치한 특이한 형태이다. 따라서 추운 겨울에서 따뜻하게 정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에도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방초정만큼 맛깔스럽지는 않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이다.
방초정은 조선 선조 때 부호군(副護軍, 종4품)을 지낸 방초 이정복(芳草 李廷馥, 1575~1637)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1625년(인조 3년)에 건립하였다. 다른 유래로는 임진왜란 때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부호군은 오늘로 치면 무관인 장군(將軍)이다.
연안이씨 집성촌인 원터마을에 자리 잡은 방초정은 몇 차례의 화재와 홍수로 현재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혼란스러운데, 1689년에 손자 이해가 처음 중건한 후, 1723년(경종 3) 여름 홍수에 유실된 것을 4년 뒤인 1727년(영조 3)에 재중건했고, 1787(정조 11년)년 다시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 보물 2047호로 지정되었다. 방초정에는 못인 최씨담과 정려각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방초정, ⓒ 전영식
아마도 정자 앞 감천에서 가져왔을 호박돌과 같은 큰 자갈을 층층이 쌓아 구들과 고래를 둔 1층 온돌을 감싼 하층부를 만들고, 굴뚝과 아궁이를 앞과 뒤에 각각 설치하여 난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면이 개방된 정자는 보통 겨울에는 추워서 이용 효율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이렇게 하면 겨울에도 어느 정도는 정자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사방에서 외풍이 들어 밤을 맞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거창, 진주로 가는 길목인데다 주변의 경치가 뛰어나 예로부터 경치를 감상하기 위하여 많은 문인 묵객이 찾아들었으며, 그들이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 지금도 정자 안에 즐비하다. 앞에는 커다란 방지(方池)가 꾸며져 있으며, 물 가운데에 섬이 둘 있다. 봄에는 정자 앞 배롱나무가 볼만하다.
방초정, ⓒ 전영식
방초정은 현재의 모습이 주춧돌이나 기둥의 형태 등이 건립 이후에 2층으로 변형된 흔적이 없다. 당초에도 2층 온돌식으로 설계되고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예고문에 따르면 방초정은 후대 이루어진 보수공사를 통해 몇몇 부재들이 교체되기는 하였지만, 기둥 상부에 결구된 이익공(익공이 2개 사용) 포작과 충량(보가 한쪽은 대들보에 나머지 한쪽은 평주에 걸리는 형식)의 결구 및 가구형식 등 전체적인 건축 수법이 대체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1788년 정자가 중건될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한 채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가치가 있다고 한다. 김천의 30여 개 누정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한다.
방초정, ⓒ 전영식
최씨담(崔氏潭)
방초정 앞 못 최씨담, ⓒ 전영식
우리말에는 물이 가두어진 지형을 못이라고 하고, 이는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으로 넓고 깊게 팬 땅에 물이 항상 괴어 있는 곳을 가리킨다. 못을 뜻하는 다른 말로는 지(池), 소(沼), 담(潭), 당(塘), 방축(防築) 등이 있다. 지는 못 자체를, 소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을, 당은 못을 만들기 위해 쌓은 둑을 말하고 이것을 뭉뚱그려 지소(池沼)라고 한다. 못에 연이 있는 경우 비로소 연못이 된다.
방초정 앞 최씨담은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지당 중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 네모형 연못에 섬이 두 개)의 전형을 잘 간직한 유일한 정원 유구로 알려졌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마을과 감천 사이에 놓여 마을의 오수나 유출수를 재처리하는 정화시스템의 역할을 해 생태 환경적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다.
최씨담(崔氏潭)은 임진왜란 때 이정복의 처인 화순최씨(당시 17세)가 신행 때 친정에서 시가로 오다가 왜병에 쫓기어 정절을 지키려고 이 못에 투신했고, 노비 여종 석이(石伊)도 뒤를 따라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려각 내에 비석이 있고 정려각 밖에 근래에 발견된 노비 석이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못 속의 섬을 최씨와 여종 석이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후세의 호사가가 만든 듯하다. 정려각 옆 비각이 하나 더 있는데 여기에도 이씨 집안의 또 다른 며느리의 열행비가 하나 더 모셔져 있다.
방초정 화순최씨 정려각 내부 비석(좌),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 ⓒ 전영식
김천의 지질
우리나라는 중생대 쥐라기 중기에 태평양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에 따른 조산운동(대보운동)을 받아서 이때 소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이 형성되었다. 이후 백악기 말에 다시 대규모의 습곡 운동과 단층 작용(불국사 운동)을 받았고 화강암 등 화성암류가 대규모로 관입하였다. 김천지역은 이 두 지질작용이 잘 나타나는 지역이다. 김천의 중앙을 서남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감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화강암류, 서쪽은 편마암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지역은 황악산(1,111m)과 삼도봉(1,176m)을 잇는 능선이 소백산맥의 주능선이다. 소백산맥은 북으로는 상주, 남으로는 덕유산으로 이어지고 가야산 쪽으로 지맥을 뻗는다. 대부분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여러 변성작용을 받은 편마암 복합체이다. 암산이 아닌 흙산이다.
동쪽 지역은 중생대 화성활동에 따른 화강암이 우세하다. 김천시가 위치한 금릉평야(금옥단층과 감천단층 만남), 주변 구릉지, 감천 본류 일대가 화강암 지대로 주변 암석에 비해 심한 풍화를 받아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방초정이 위치한 상원리도 중생대 백악기 각섬석이 부수된 화강섬록암이 분포하고 있어 평야 지대를 이룬다. 동쪽 금오산(977m)과 서남쪽 대덕산(1,290m)은 침식 저항력이 큰 안산암&유문암 그리고 안산암으로 형성되어 높은 산지를 이룬다.
정자에는 인물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 글자가 있다. 방초정은 평지 정자로 스토리가 남아 있다. 거창의 정자들은 바위가 좋은 곳에 반드시 글귀를 새긴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정자는 사라져도 글귀는 남는다. 좋은 장소를 찾아가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풍류 이상의 눈썰미가 있어야 가능하다. 여행 중 주변에 정자를 안내하는 안내판이 보이면 일단 찾아가고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