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지질학
수도권의 역사 답사는 궁궐이 중심이지만, 또 다른 백미는 왕릉이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조선 왕조는 총 42개의 왕릉 중 39개를 수도권에 남겼다. 나머지는 강원도 영월에 단종의 장릉이 있고 북한에 2기가 있다(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제릉, 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이처럼 온전한 무덤 유적군은 세계적으로 드물어서 우리나라에 보존된 40기의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왕족의 무덤은 주인의 신분에 따라 달리 부른다. 황제와 황후,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 등)의 무덤은 원(園), 그리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墓)라고 부른다.
왕릉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사용된다. 건물의 기초를 담당하는 축대석, 길을 만드는 판석, 각종 석조조각물, 그리고 묘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왕릉뿐 아니라 일반인의 묘에서도 가장 중요한 석물은 단연 묘비(碑)이다.
묘비는 무덤 앞에 세워진 비문을 새긴 돌이다. 보통 돌로 만들기 때문에 비석이라고 부른다. 비석에는 무덤의 주인의 이름, 생년월일과 사망일을 음각하여 적는다. 묘를 찾는데 쓰이는 문패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하고 종교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묘비에는 망자를 기리는 간단한 문구 등을 쓰기도 하는데 이를 묘비명 또는 영어로 에피타프(epitaph)라고 한다, 후손이나 친지가 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쓰기도 한다.
왕릉의 비석은 표석과 신도비(神道碑)로 나뉜다. 표석은 간단히 망자의 이름, 생몰 연월일을 쓴다. 신도비는 망자의 길, 즉 신도(神道, 신령이 지나가는 길) 우측으로 무덤 남동쪽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능의 주인공 삶을 기록한 비문을 새긴다. 신도비를 세우는 것은 지시한 왕에게도, 글을 짓고 쓰고 새기는 사람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글을 새기는 비신은 능의 석물 중에서 가장 최고급의 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판석이나 연석은 그저 적당한 것을 선택하여 사용하면 된다.
문종(1414~1452)은 이런저런 이유로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였고, 공신이나 석학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종 2품 이상을 지낸 인물에 한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으나, 숙종 1년(1675) 이후부터는 정 2품 이상 관직을 지냈거나 정 2품 이상으로 추증된 인물에만 이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신도비는 너무나 많아 전국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한에 왕릉 신도비는 단 3개(건원릉, 헌릉, 구 영릉)뿐이 없다. 신도비는 비각 내에 있다. 2013년 7월에 3개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는 표석과는 다르게 망자의 업적을 새겨야 하기 때문에 일단 크기가 커야 한다. 업적은 보통 장황하게 쓰여서 글씨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글씨가 잘 새겨지는 세립질의 암석이 선호된다. 화강암 같이 입자가 굵은 조립질의 암석은 세밀한 글자를 새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리석이 선호된다. 새김성이 좋다면 무늬나 결 등은 부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의 그만한 크기의 석재를 구하거나 채석하기 힘든 기술적인 한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건원릉 신도비(높이 448cm, 비신 227cm)가 있는데 태종 9년(1409)에 건립되었다. 건원릉은 개성의 고려 공민왕 능인 현정릉의 구조대로 조성되었으나 신도비를 추가했다. 보물 제1803호로 지정되었다.
길창군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썼으며 지의정부사 정구(鄭矩)가 위 머리말인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다. 비의 뒷면에 쓰인 음기(陰記)는 예조좌참의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지었고 성석린이 글씨를 썼다. 특히 비음기에는 43명의 개국공신, 22명의 정사공신, 43명의 좌명공신 등 총 116명의 공신명단이 새겨져 있다. 총 높이 448㎝의 규모에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을 갖추었다. 숙종 17년(1691)에 비석이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하여 글자를 확인하기 어려워 비각을 건립하여 안치되었다.
연꽃을 새긴 2단의 대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수에서 좌우로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는데 아래로 향한 용머리는 길게 하여 차이를 두었다. 용의 골격, 비늘이 매우 선명하게 조각되고 보존상태가 좋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건원릉 신도비의 이수와 비신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어져 있다. 일부 자료에는 화강암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대리석의 물결무늬가 선명하다. 석재의 출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납작 엎드린 자세로 작은 눈과 코, 웃는 듯한 입술이 매우 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제3대 왕 태종과 왕비인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의 신도비는 두 개이다.
비각 입구 앞의 구 신도비(높이 520cm, 비신 292cm)는 세종 6년(1424)에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 중에 받침돌인 귀부가 훼손되었다. 비문은 건원릉 신도비의 음기를 쓴 변계량이 지었고 전서체로 쓴 비석의 머리글자인 전액(篆額)은 당대의 서예가 권홍(權弘)이 썼고 글씨는 성개(成慨)가 썼다. 뒷면에 쓰인 비음기는 윤회(尹淮)가 지었고 마찬가지로 성개가 썼다. 여기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1,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정사공신, 좌명공신이 명단을 새겨 넣었다. 보물 제1804호로 지정되었다.
헌릉 구 신도비는 건원릉 신도비의 장대한 귀부이수 양식과 규모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귀부는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신도비의 핵심은 비신과 이수라고 할 수 있어 이 정도도 그나마 다행이다. 남아있는 귀갑(龜甲)의 6 각형 문양마다 ‘왕(王)’자를 양각해 놓아 왕릉 신도비의 귀부임을 나타내고 있다. 강화도에서 채석한 화강암인 강화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수는 건원릉 신도비의 이수 구도와 거의 동일하다. 4마리의 용이 좌우로 2마리씩 비신의 위쪽을 입에 물고 날아오르는 형상을 실감 나게 표현하였다. 이수 가운데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전액을 배치하였다. 이수와 비신은 강화도 마리산(摩利山, 또는 摩尼山) 서쪽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백색 계통의 대리석인 청란석(靑蘭石) 한 덩어리를 건원릉 신도비의 비신보다 좀 더 큰 규모로 다듬어 수로로 운반하였다. 병화를 거치며 훼손되어 비신의 표면은 많이 떨어져 나갔고 색상도 불에 그을린 듯 붉게 변색된 상태이다.
우측에 있는 신도비(높이 540cm, 비신 326cm)는 숙종 21년(1695)에 중건한 것이다. 변계량이 지은 비문과 윤회가 지은 비음기는 구 신도비 것을 그대로 재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조판서 박태상(朴泰尙)이 중건 과정을 기록한 추기를 첨부하였다. 병조참의 이덕성(李德成)이 글씨를 쓰고 병조참지 홍수주(洪受疇)가 전액을 썼다.
1695년 중건된 신도비는 왕릉 신도비의 전통에 따라 귀부이수 양식을 갖추었지만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수의 앞뒤에는 각각 용 2마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1개의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쌍룡쟁주(雙龍爭珠) 구도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귀부에는 머리에 뿔이 2개 솟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송곳니를 크게 드러내는 등의 역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어 이전의 왕릉 신도비와 양식상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귀부는 건원릉의 것보다는 무섭게 표현되어 있다. 불타는 눈썹과 벌린 입의 이빨이 드러나 사나운 느낌을 준다. 거북이 등에서 껍질이 벗겨지며 비신이 솟아나는 듯한 표현이 눈에 띈다. 과천 영주산(현 관악산)에서 채석되었다. 뛰어난 석조작품이다.
1695년에 중건한 태종 헌릉의 신도비의 비신은 황해도 금천에서 산출된 검은색의 결정질 석회암이다. 신도비 상하에는 석재의 결이 고르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 아마도 원래 암석의 상태로 보인다. 우측 상부에서 좌측 하부로 무늬가 이어져 있다. 이는 후면에서 보면 더 확연하다.
헌릉의 서쪽에는 조선 23대 왕인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仁陵)이 있다. 외척의 발호를 물리치기 위해 장인과 처남들을 처형한 태종 이방원의 능과 외척의 등쌀에 결국 나라의 운명이 기울게 만든 순조의 능이 같은 울타리 내에 있는 것을 보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헌릉 구신도비는 건원릉 신도비에서 시작된 왕릉 신도비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도비이자 이후 건립된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의 앞선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왕릉 신도비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세웠던 원비(原碑)와 후대에 다시 세운 중건비가 함께 남아 있어 15세기~ 17세까지의 왕릉 신도비 조성 과정을 밝히는데 매우 소중한 사료로 생각된다.
영릉은 1450년 6월 태종의 헌릉 서쪽 편 기슭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영릉 신도비는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와 중추원부사 김조(金銚)가 왕명을 받들어 각각 비문과 비음기를 짓고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문종 2년(1452) 2월 능상(陵上) 아래에 건립하였다. 3월에는 비각이 완성되었다.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릉을 옮기고자 했으나 결국 사후인 예종 1년(1469) 3월 영릉은 여주로 천릉(遷陵)하고 7월에는 구(舊)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雜像)을 땅에 묻었다.
숙종 17년(1691)에 오랜 장마로 신도비의 모습 일부가 땅 위로 드러나자 도로 흙을 덮었다. 영조 14년(1738) 9월 연성수(蓮城守) 이근(李槿)이 신도비를 찾아내어 옮겨 세우자고 상소하였고, 10월에 왕명으로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땅을 3척쯤 파서 찾아냈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다 마모되어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1973년 3월 이화여대 박물관팀이 백색 대리석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비신과 이수를 발굴하였으나 귀부는 끝내 찾지 못하였고 이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세울 때 자연석을 비신 받침돌로 삼았다. 1999년 2월 귀부를 새로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 비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
이수 앞뒤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중국 당나라 양식을 따른 건원릉과 헌릉신도비의 이수와는 다른 조선시대만의 고유한 양식이라고 한다. 마모가 많이 되었지만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생동감이 넘친다. 규모도 거대하여 이전의 왕릉신도비들을 압도한다. 영릉 신도비의 비신과 이수 총높이가 450㎝이고 건원릉 신도비는 335㎝이며 헌릉 신도비는 420㎝이니 그 크기가 매우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귀부가 있었다면 총높이가 약 600㎝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역대 왕릉신도비 중에서 제일 거대한 규모이다.
구 영릉 신도비는 앞의 두 신도비와는 달리 이수의 용이 비신까지 내려와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신을 이루는 암석이 상부에서 하부로 띠 모양을 이루고 있다. 충주의 대리석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망실된 귀부는 아마도 화강석으로 되어 있었을 것인데 파격적인 이수의 모습을 미루어 보건대 매우 파격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왕릉은 지금까지 1기도 발굴 조사되지 않았다. 다만 현재 국가정보원 내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초장지(初葬地)였다고 추정되는 구 영릉에 대해 발굴 조사가 시도된 바가 있다. 구 영릉은 시신을 수습하여 여주 영릉으로 천장하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왕릉의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석실 같은 구조물과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2008년의 조사에서 표토만 제거한 상태에서 강회 다짐과 그 하부의 숯층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기록과 다른 무덤이 나왔고 이미 1974년에 발굴조사가 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추후에 초장지가 발견될지 두고 볼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3개의 왕릉 신도비는 왕릉 양식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다. 신도비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그 크기가 더욱 커지고 대담한 기법이 적용된 경향을 볼 수 있다. 귀부가 망실된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는 태조의 신도비보다 높이가 1m 이상 컷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중의 비석인 조선 왕조 신도비를 방문하여 탐방해 보는 것도 역사를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대리석(marble)은 석회암이나 백운석 같은 탄산염 광물이 재결정된 변성암이다. 지질학적으로는 대리암이 맞지만 통칭 대리석으로 쓰인다. 포함된 성분에 따라 다양한 색상이 나타난다. 탄산염암이 주성분이므로 산성비에 취약하다. 중국 윈난성의 대리국(현재 다리 바이족 자치주)에서 많이 산출되어 대리석으로 불린다. 이 지역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 산출되고 있는 대리석은 지체구조별로 한반도 남부에서 북동향으로 발달하는 경기육괴,옥천대와 영남육괴 내 변성암 지역에 분포한다. 선캠브리아기의 대리석류는 경기육괴와 영남육괴내에 협재된 결정질 석회암으로 산출되며, 일부는 화강암질 편마암 내 포획암으로 발달한다. 시대미상암류인 옥천층군이 국내 대리석 석재의 주요 분포지이며, 여기에는 향산리 돌로마이트질 석회암, 계명산층과 문주리층 등이 해당된다. 조선누층군은 캠브리아기의 풍촌석회암, 오르비스기의 정선석회암 등이 해당되며 옥천층군의 대리석산지와 함께 국내 대리석 석재의 주요 산출지이다. 그리고 평안층군의 홍점층군 내에 협재하는 대리석과 시대미상의 각력질 석회암이 해당된다.
자기가 쓴 묘비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것이다. 국내에는 "우물쭈물 살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로 소개되어 작가의 위트가 듬뿍 담겨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비석에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되어 있다. 번역하면 “충분히 오래 살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정도가 된다. 돌에 새겨진 글씨라도 자기 생각대로 읽는 사람의 마음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1. 김민규, 2019, 조선시대 능묘 비석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 이우상, 2014, 잠들지 못하는 역사 조선왕릉, 에스앤아이팩토리
3. 이춘오, 홍세선, 이병태, 김경수, 윤현수, 2006, 국내 석재산지의 지역별 분포유형과 특성, 암석학회지, 제15권 제3호, p.154~166
4. 조선왕조실록
5.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6. 차문성, 2019, 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재료와 제작방법 변화에 대한 연구, 문화재, 제52권, 제4호, p.56-77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