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돌에 세기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석상은 돌 하나를 이용하여 부처님의 전신을 새긴다. 석굴암의 본존불,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이 그 예이다. 마애불류는 바위 돌의 한 면 만을 이용한다. 서산 마애삼존불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돌 하나의 여러 면에 다수의 불상을 세기는 것이 있는데 이를 다면불이라고 부른다.
이차돈과 백률사
경주시청 동쪽으로 소금강산(177m)이 있다. 중생대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소금강산 남쪽에는 탈해왕릉이 있고, 서쪽 중턱에는 불국사의 말사인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480년대 후반~540) 때인 527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이차돈(504~527?)이 순교할 때 목이 날아가 떨어진 곳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 순교를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의 하나라고도한다.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1914), 출처: 경주박물관
백률사 올라가는 길 초입에 굴불사지가 있고 여기에 보물 제121호인 석조사면 불상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6대 왕인 경덕왕(722~724)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동해서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 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게 했다.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는 큰 돌이 나왔다. 거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불사(掘佛寺)라고 했으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堀石寺)라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 탑과 불산 편,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 전영식
다면불은 보통 바위의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각각 독립적인 불상을 새긴 것을 말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서쪽에 아미타여래, 동쪽에 약사여래, 북쪽에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여래를 배치하고 있다. 가장 긴 폭이 4m, 높이는 약 3.5m의 입방형 화강암 바위다.
이 불상의 특징은 석조 조형물 혹은 마애불에 나타나는 모든 조형 기법이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네 면의 조형물이 밀도 높게 배치되어 있어 보는 맛이 상당하다. 투박한 신라양식에서부터 인도 굽타 양식까지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대체로 통일신라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모든 조각이 이루어졌는지 이후에 조형물이 추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서쪽 편 ⓒ 전영식
이 석조사면불상은 서쪽이 가장 주된 방향이다. 가운데 가장 큰 아미타여래를 배치하고 이의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시키고 있다. 아미타여래의 몸은 바위 돌 자체를 이용하여 만들어졌고 머리는 다른 돌로 만들어 올렸다. 협시 보살은 독립된 암석을 이용하여 만들어 세워 놓았다.
사방불은 석탑 등에도 새겨진다. 보통 남쪽에는 석가모니불, 북쪽에는 미륵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을 배치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석불로 알려진 예산 화전리 사면불(보물 제794호)에도 이 형식이 나타난다. 하지만 굴불사지 사면불상에는 서쪽에 삼존불, 남쪽에 이존불을 모시면서 이 틀에서 약간 벗어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남쪽 편 ⓒ 전영식
남쪽에는 실물 크기의 등신불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석가여래 삼존불이라고 한다. 사진 좌측 편으로 정으로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찾기는 어렵다. 불상의 육체가 대단히 육감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옷의 주름이 힘 있게 묘사되어 있다. 발아래에는 복련과 앙련을 새긴 이중기단이 있다고는 하나 답사 시에는 토사에 매몰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동쪽 편 ⓒ 전영식
동쪽 편에는 약사여래좌불이 새겨져 있는데, 결가부좌로 눈은 감고 있다. 사면불 중 유일한 좌불이다. 왼손에는 둥근 보주를 들고 있다. 여래불의 머리 쪽은 상당히 고부조이나 몸 쪽으로 갈수록 양감이 줄어든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추적자가 벽에서 나오는 모습 것처럼, 돌 속에서 부처가 슬쩍 나오는 모습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위가 기울어져서 거기에 새기다 보니 어쩔 수 없게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북쪽 편 ⓒ 전영식
백제계 마애불은 고부조의 입체성이 강하고 신라계 마애불은 암석을 선으로 파낸 암각화의 전통이 강해 선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북쪽 편에도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북쪽 우측에 보이는 미륵불은 고부조이지만 좌측에 보이는 면에는 음각으로 조형한 십일면육비 관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즉 11면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밀교적인 특성이 강한 관음보살이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탁본이나 측면조명 야간촬영으로나 간신히 확인할 수 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북쪽 편 십일면육비 관음보살입상 출처: 최성은(2014)
우리나라에서 사면불상은 이외에도 예산 화전리 사면불(보물 제794호), 경주 칠불암 사면석불(국보 제312호),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이 있다.
예산 화전리 사방불(좌), 문경 대승사 사면불(우),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마애석불의 경우, 한쪽이 원래 기원한 암반에 부착되어 있는데, 이는 그 지역을 구성하는 암석과 동일한 기원의 암석인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사면석불의 경우는 모암의 노두에서 분리된 전석(轉石)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크기가 크기 때문에 옛날의 기술로는 이전이 불가능한 크기가 많다. 특히 산중턱에 있는 사면불은 주변을 이루는 암석과 같은 성인일 가능성이 크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절리 분포, 출처: 윤순옥 외(2012)
이러한 경우, 주변 암석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인 절리나 균열을 이어받을 수 있다. 사면불을 만들 만한 크기의 암석인 경우, 절리나 충진구조가 없는 완벽한 덩어리 암석을 찾기가 힘들고 그 암석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함이 있는 부위를 포함하여 조형물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는 태생적으로 균열 등에 약한 부분을 안고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나라 석조 조형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흠이다.
또 사면석불은 말 그대로 사면이 외부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식물, 곤충, 풍화작용 등에 의한 훼손이 상대적으로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또 일조량 등이 균형적이지 않으므로 햇볕이 안 드는 북쪽 편은 습기에 따른 훼손도 더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보수를 위해 충전한 물질도 기본적으로 원물질이 아니므로 전체적인 풍화의 현상과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고 여기에 습기가 모이고 식물이 살게 되어 취약점으로 작용한다. 이 현상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심성암인 화강암의 경우, 만들어진 곳과는 다른 지표에 노출되면 암석에 미치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표면을 따라 떨어져 나오는 박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암석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며 어떠한 방법으로도 회피하기 힘들다. 암석이 다른 부자재에 비해 강하고 오래가는 물체임에는 분명하지만 암석도 시간이 지나며 풍화되고 침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에 사람이나 동식물이 작용하면 그 파괴는 가속화된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에티켓이 필요한 이유이다.
2022년 여름에 불어 닥친 태풍 '힌남노'의 피해를 보아, 아직도 아래쪽 유물이 토사에 매몰되어 있고 주변이 어수선하다. 한 번의 태풍으로 이렇게 훼손된 것이 아깝지만, 1,300여 년 전의 유물이 아직도 이 만큼이라도 보존되어 있다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파괴하기도 하고 보존하기도 한다. 이런 유물이 아직도 여러 곳에 묻혀 남아 있기를 바란다.
굴불사지는 관광객으로 번잡한 경주에서 한적하지만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쉽게 보기 어려운 사면 석불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이해하게 되는 곳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