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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Jan 01. 2023

황금의 땅에 지어진 절, 금산사

문화유산 지질학

나중에 알고 보니 금산사는 행정구역상 김제지만 전주서 가는 게 편했다. 시내버스가 김제에서 보다 전주에서 자주 다닌다. 그만큼 전주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김제서 가는 길은 넓은 만경평야를 지나고 주산인 모악산(금산)으로 들어가니 속세의 마음을 바로 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금산사(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는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반도 미륵신앙의 시조로 불리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생몰년미상)를 창건주로 보고 있으나 삼국유사에 그가 금산사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어 맞지 않는 듯하다. 진표율사에 의해 장륙상이 완성된 시기가 764년 6월이라는 기록이 있어 대략적인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금산사사적>에는 백제 법왕 즉위년 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래된 절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하다.


금산사 미륵전, 뒤편으로 모악산 정상에 군기지가 보인다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시발점이요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견훤은 미륵전에 유폐되었다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주변이 산이기는 하지만 평지에 있는 절이어서 폐쇄적이지 않다. 정말로 가둬 두려면 이런 곳 말고 더 좋은 장소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에게 교화받은 뒤, 금산사는 법상종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 후기까지 법상종의 중요 사찰로 존속했다. 임진왜란 때 의승의 중심지가 되어 사찰이 불태워진 후 중창되어 1725년 영조 1년, 화엄대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법석을 맡았던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 스님은 역모에 몰려 제주도에서 입적하게 된다. 억불숭유 정책 당시의 어두운 기억이다.


육각 다층석탑


금산사는 보물이 많다. 미륵전, 노주, 석련대, 혜덕왕사진진응탑비, 오층석탑, 금강계단, 육각 다층탑, 당간지주, 석등, 북강삼층석탑 그리고 대장전이 그것이다. 유물에 대한 글이 여러 곳에 많기 때문에 이번 글은 육각 다층석탑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층석탑은 흔치 않고 게다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은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탑은 대적광전 앞뜰에 있다. 노주와 석련대가 1열에 위치한다면 석탑은 2열 좌측에 미륵전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원래 봉천원 구역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봉천원은 절의 동북쪽 지역 어딘가로 전해진다. 높이 2.45m의 점판암을 재료로 다면의 입체로 조성된 고려시대 이형탑이다. 고려 초에는 통일신라의 석탑형식을 변형한 6각 내지 8각의 석탑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원명대사가 귀국한 1328년 후에 금산사를 중창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해체보수 및 보존처리가 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3층 기단부에 점판암으로 된 2층의 탑신 받침이 있고 11층의 지붕돌로 되어 있다. 맨 위에는 화강암 보주가 있다. 11층과 10층에만 탑신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기단부 받침돌은 6각형이 아래로부터 비례를 이루어 좁아지며 2,3층의 각면에 사자를 돋을새김으로 장식해 놓았다. 탑이 점판암이지만 전체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압력에 강한 화강암으로 만든 듯하다. 탑신받침은 2층의 연화대인데 복련과 앙련의 형식으로 보이고 중간에 지금은 소실된 면석이 있었음을 일재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탑신부 저부,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탑신은 단면 6각의 몸돌과 지붕돌(옥계석)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맨 위의 2개 층만 몸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몸돌에는 각 면마다 귀기둥이 조각되었고, 면석의 가운데에는 광배 안에 선각한 좌불이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의 추녀 밑은 수평이고 윗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지만 끝부분이 살짝 들려져 있고 종을 달았던 구멍이 나 있다.  밑면에는 받침이 있으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중앙부가 넓게 가공되어 사리구의 봉안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 보주는 화강암 돌 하나로 만들어져 있는데, 후대에 보충된 것으로 보인다.


각 층의 체감 비례가 적절하여 조형미가 뛰어나다. 몸돌 및 지붕돌 각면에 선각된 부처상이 세밀하고 우아하다. 현재는 11층까지 남아 있지만, 원래는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처럼 1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시기는 몸돌 굄대의 연꽃무늬나 몸돌과 지붕돌 각 면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10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정확한 사료는 없다.


청석탑은 현재까지 남한에 18개가 존재하며 문헌사료에서 파악된 12개까지 포함하면 30개 정도만이 알려진 진귀한 석탑이다(김선, 2020). 완전한 형태의 탑은 하나도 없고 탑신석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탑신석이 남아 있다면 전체비례가 좋아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운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석이라고 불리는 점판암은 화강암에 비해 내구성이 약해 풍화에는 취약하지만 장엄장식을 세기기에 매우 유리하다. 대리석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세밀한 김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암석이다. 청석탑은 주불전에서 벗어난 구역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찰의 구성이 완료된 후 장식적으로 유력자에 보시에 의해 세워졌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전미숙(2016)은 점판암을 퇴적암으로 표시하여 산지를 잘못 추정하고 있다. 점판암(slate)은 셰일이 압력에 의한 광역변성작용을 받아 형성되는 변성암이다. 셰일보다 치밀도가 크고 편리가 잘 발달하여 편리면을 따라 쪼개지는 특성이 있다. 이 탑의 지붕돌 끝의 침식단면을 보면 점판암임을 알 수 있다. 박덕원 외(2004)에서 흑색 셰일을 청석이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암석의 통칭을 표시한 것으로 정확한 암석명은 아니다.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의 10~11층 몸돌과 지붕돌 및 보주


남한에서 점판암은 옥천변성대내 보은, 옥천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옥천변성대는 태백, 삼척에서 목포에 이르는 길이 400km, 폭 50~60km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북동부의 비변성대와 남서부의 변성대로 나뉜다. 점판암은 오천분지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주변에서 많이 나타난다. 청석탑은 각 부재의 크기가 비교적 작아 운반이 용이했을 것이고 산지에서 제작 후 완제품을 운반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청석탑의 파편에 대해 지화학적 광물학적 조사를 하면 그 산지에 대한 추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다각탑은 8층이 대부분이고 한강 이북에서 많이 발견된다. 때문에 한강에서 멀리 떨어진 호남에 6각의 탑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점판암 청석탑의 존재가 점판암의 산지에서 이처럼 떨어져 있는 점도 특이하며 몸돌이 일부나마 남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귀신사(歸信寺)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절이다. 전주 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내리면 되는데 기사도 잘 모르는 절이다. 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사찰이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국신사(國信寺)에서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말(1873년)에 귀신사로 바뀌었다. 통일신라 때에는 화엄 10찰 중 하나로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허망하게 대적광전, 명부전과 요사채만 있으며 대적광전 뒤편 축대 위에 삼층석탑과 석수가 있다. 보물 제826호였던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며 앞면 5칸 측면 3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앞면과 뒷면의 다포형식이 다르고, 앞칸의 양쪽 두 칸이 상대적으로 좁다.



단청을 안 한 대적광전에는 삼존불이 있는데 비로자나불 주위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있다. 1980년에 개금 했고 보물 제1516호이다. 상당히 큰 17세기 소조불상이다.  대적광전 뒤로 돌아가면 계단 위에 꼭대기 부위가 손상된 고려시대 석탑이 있고 사자인지 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석수가 하나 있는데 외설스러운 물건을 등에 지고 있다. 그 용도 또한 오리무중이다.


1992년 당시 유명했던 소설가 양귀자는 귀신사를 소재로 단편 <숨은 꽃>을 썼고 그 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활동에 슬럼프가 온 주인공은 별 뜻 없이 김제로 향한다. 뜻밖의 사람과의 만남은 고흥 거금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대단한 학력이나 직업이 없는 자유로운 김종구와 황녀는 귀신사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야성적이고 흥겹게 살아가고 있다. 저녁 자리에 이어진 단소연주에 작가는 스스로 갇힌 세계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김종구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야기한다. “사는 일이 가장 먼저란 말이오 사는 일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고 하찮은 것이라 이 말입니다.”, “머리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의 해체 등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커다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주인공은 이를 통해 미로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양귀자는 이전까지의 사회성 짙은 소설에서 벗어나 페미니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판타지 연애소설 <천년의 사랑>을 쓰게 된다. 믿음이 돌아왔는지 그리고 숨은 꽃의 꽃말이 무엇인지는 작가에게 물어보았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황금의 땅 김제


금산사 근처에는 유독 금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금평(金坪), 금산(金山), 금구(金溝), 김제(金堤) 등이 그 예이다. 신라 때부터 사금이 많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모악산의 지질은 중생대 화강암인데 화강암이 결정화되면서 남은 열수유체가 주변에 많은 금광을 만들어 놓았다. 지질도를 보면 금평 저수지에서부터 전주 용복동까지 금광표시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금맥은 강물에 침식되어 흘러내려갔으며 평야의 범람원에는 사금을 뿌려 놓았다. 모악산은 김제평야에 솟은 큰 산이고 평야와 만나면서 강물의 속도가 늦춰졌을 것이다. 전형적인 퇴적광산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금산사 주변의 지질도, 동그라미에 Au라고 쓰인 곳이 금광이다.   파란색 원이 금산사, 출처: 지질자원연구원


금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광산업자와 절의 충돌은 스님의 목숨을 가져갔다. 미륵전 오른편에 ‘금산사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수호기’라는 비석이 서있다. 내용을 보니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수십 년간 금산사에 머물며 수많은 불사를 진행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0년 절 남쪽에 대규모 금광이 채굴되면서 절에 피해가 생겼다고 한다. 대사는 관아의 결정을 받아내어 채광금지령을 얻었으나 채광꾼의 침입으로 그들에게 순교당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김제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금광 붐이 일어났다. 1906~1912년 동안 매년 3~9개씩 총 37곳의 사금광이 허가되었다. 1934년에는 무려 36건의 사금광이 허가되었다. 아마도 아래 사진(홍성)의 사금채굴선 같은 것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했으니 주변의 금호황은 대단해서 아마 동네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다녔으리라. 1952년 김제의 금 생산량이 10.5kg이었는데, 1940년대 생산량의 2%에 불과하다는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년간 500kg의 금이 나왔다는 추정이 되니 엄청난 양이었다.


금마사금채굴선 사진(1930년대), 출처: 홍성군 역사문화시설관리사업소


김제에는 1980년대에 다시 한번 골드러시가 불어 닥쳤다. 1983년 황산면과 금산면 평야에 1백여 개 소의 광산이 개설되었고 1987년까지 매년 70여 개 정도의 금광이 생겼다. 원인은 갑자기 금이 발견되서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다. 1980년 중동의 건설 붐이 수그러들면서 대량의 건설장비가 국내로 반입되었다. 이 장비를 이용하면 경제성 있게 채광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광산업자가 사업을 일으킨 것이다. 중장비를 이용하여 논의 겉흙을 들어내고 모래층에서 사금을 털어낸 뒤 다시 겉흙을 덮는 방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박이 난 사람도 있고 쪽박을 찬 사람도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채광량 감소와 금수입자유화로 골드러시는 끝났다. 지금 간혹 나오는 김제 사금이야기는 개인이 즐기면서 하는 낚시 같은 사금 캐기다.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 근처에는 이런저런 종교의 아우라가 충만하다. 계룡산 보다도 많은 신흥종교가 있다고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어린 날을 보냈고, 증산교의 강증산이 세운 구릿골 약방도 근처다.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정여립이 대동계를 만들고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미륵불을 기다리지 못하는 민중의 조바심의 반영일까?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운명에 종속된다. 그러면 이 모두가 땅의 영향이 아닐까?


미륵이 오는 것은 언제인가? 이제 사람들은 절집보다는 근처에 화려한 베이커리 카페로 가서 시주가 아닌 커피값을 내고 주일을 보낸다. 절집 앞 주차장은 한산하고 카페에는 차 댈 곳이 없다.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 전라북도의 석탑

2.     김남윤, 이응묵, 소재구, 2002, 금산사, 대원사

3.     김선, 2020, 제주 수정사지 출토 청석탑의 제작지 검토, 고문화 제95집, p.67~86

4.     박덕원 외, 2004, 흑색사암(오석)과 흑색셰일(청석) 석재자원의 지질과 산출유형, 자원환경지질, 제37권 제6호, p.585-601

5.     전민숙, 2016, 고려시대 청석탑에 관한 연구, 불교미술사학, vol.22, p. 97-130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https://brunch.co.kr/@8133d3a5098c4e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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