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던 해인 1936년, 7월 4일 오전 6시, 하동 쌍계사 근처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규모는 5.0이고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일어난 두번째로 큰 지진이었다. 당시 한반도 내의 5개 지진관측소와 일본의 6개 관측소에서 기록되었고, 한반도 남부 전역과 일본 쓰시마까지 진동이 느껴 졌다. 지진의 강도에 있어서 규모(M)와 진도(V)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규모는 절대적인 세기의 척도이고 진도는 특정 장소에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세기의 척도이다. 아무리 규모가 커도 먼 곳에서 느끼는 진도는 작아진다.
지진은 아직까지 예측할 수 없는데, 일부에서는 동물이 먼저 지진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쌍계사 지진시에 지리산에서 뱀이 몰려나오거나 개구리가 쏟아져 나왔다는 보고는 없다. 만일 지진을 동물이 먼저 느낄 수 있다면 전국의 지진측정소는 동물원이 되었을 것이고 일본은 전국에 동물원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현명하게 그런 곳에 예산을 쓰지 않고 있다.
1936년 지리산 지진시 쌍계사의 주요 피해 현황, 출처: 선창국 등, 2008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길은 현재 5.4km인데 당시 길 중 13개 소의 1km 정도가 붕괴되었고 쌍계사 부근 2개소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났다. 쌍계사의 진감선사 탑비(국보47호)가 훼손되었고 종무소의 벽과 천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금당 앞 5층 석탑의 탑두가 땅에 떨어졌다.
쌍계사 지진의 피해를 보도한 1936년 7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지진발생 소식은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7월 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대구에서 지진에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대구 측후소 발표는 진앙거리는 96km로 진원은 전북지방인 것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6일 뒤 기사에서 진원지가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다시 발표되면서 쌍계사 인근의 피해가 보도되었다.
지진 자료에는 역사 지진 자료와 계기 지진 자료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역사 지진 자료는 지진계가 발명되고 우리나라에 설치되기 이전에 각종 문헌 자료에 실려 있는 지진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779년 경주에서 일어나 지진은 집들이 무너지고 100여명이 사망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게 그 예이다. 쌍계사 지진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계기 지진 자료를 얻은 지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쌍계사 지진은 후에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질자원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지진관측소가 있다. 경주의 지진에서 보듯이 지진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발생하는 장소에서 다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이제 우리의 국격이 높아진 만큼 좋은 지질관측장비를 통해 질 높은 연구가 수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에 있는 지리산종합지진관측소, 출처: 네이버 지도
이 지진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쌍계사에는 아직도 지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물 47호인 진감선사 탑비가 특이하게 대웅전 앞 아래단의 마당 가운데에 삐뚤어 있는데 86년이 지난 현재에도 당시 지진으로 넘어져 깨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해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 고정시켜 놓았다.
전체 높이 3.63m, 비신 높이 2.1m, 너비 1.0m, 두께 22.5m이다. 귀부와 이수,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귀두는 용머리로 되어 있고 귀부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이 심플하게 새겨져 있다. 887년(진성여왕 1년)에 고운(孤雲) 최치원(857~908?)이 비문을 짓고 쓴 것으로 유명하다. 최지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중의 하나이다. 진감선사 혜소(774~850)가 입적한 뒤 30년이 지난 후 세워졌다. 그는 중국 산동지방 사람으로 항복하여 고구려인이 되었다가 고구려 멸망 후 익산으로 이주했고 쌍계사를 중창하여 선을 가르치고 범패를 보급했다.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이수와 귀부는 화강암이고 비신을 백대리석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실재로 비신은 대리석은 아니고 세일인 듯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엉터리 정보를 올려 놓지 말고 차라리 빈칸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눈에 띄는 것은 울타리를 이루는 돌기둥 8개인데 암석의 색이 귀부와 다르고 입자의 크기도 상당히 크다. 비석 자체보다 오히려 품격과 세월의 흐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반려암인 듯한데 이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암석이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나중에 타지역의 암석을 다듬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의 귀두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의 테두리 돌
다시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경내로 들어서 보자. 쌍계사(雙磎寺)는 그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두개의 계천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버스 정류장에서 화계천을 건너면 왼쪽으로 석문 가는 길이 나온다. 옛날에 쌍계사로 들어가는 주 출입구였다고 한다. 지금은 대형 주차장이 생긴 석문 윗쪽에서 바로 절로 올라가니 여기를 지나는 사람은 뚜벅이 답사하는 사람 말고는 없다.
쌍계 석문
음식점 몇 개를 지나가면 ‘쌍계와 석문’이라고 각각 새겨진 두개의 바위를 만나는데, 글자를 고운(孤雲) 최치원(857~?)이 썼다고 한다. 지금은 시진핑이 쌍계를 언급했다는 표지판이 옆에 붙어 있다. 시진핑이 이렇게 오래할 줄 모르고 간단히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시진핑 주석은 '2015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 서울 행사에 보낸 축하메시지에서 최치원의 '호중별천(壺中別天)'을 인용했다. 전에도 최치원 선생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시 주석은 "동쪽 나라의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구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의 시인 최치원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칭송했다"고 언급했다.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참모들이 최치원의 싯구를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는 지리산 남록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723년(신라 성덕왕 2년)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호랑이를 쫓아 들어와 세웠다고 한다. 창건 설화를 보면 조금 엽기적인데 이 때 두 스님이 절로 들고 들어온 것이 당나라 육조 혜능(638~713) 스님의 머리(頂相)라고 한다. 혜능스님이 쓴 육조단경에는 “내가 입적하고 수십 년이 지나면 어떤 사람이 내 머리를 취하려는 절취 사건이 벌어지고 동방보살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읽은 삼법, 대비 두 스님이 중국까지 가서 두번의 시도 끝에 옻칠 되어 있는 혜능의 미이라에서 머리를 잘라 가지고 들고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는 절취 시도가 실패하였다고 적혀 있고 실재로 현재까지 혜능의 전신이 보존된 점을 보면 쌍계사에는 혜능의 정상이 실재로는 없는 듯하다. 어쨌든 두 신라인이 혜능의 글을 읽었고 결심하여 중국까지 가서 시도를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화랑정신은 아니겠지만 무척 용감했던 분들은 맞는 것 같다. 현대 중국인들도 이를 알았다면 간담이 서늘할 것이다.
이후 830년 진감국사 혜소(774~850)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옛 절을 크게 확장하고 옥천사(玉泉寺)라고 하였다. 신라 50대 왕인 정강왕(863~887)이 이웃 마을에 옥천사가 있고 산문 밖에 두 시내가 만나니 쌍계사라고 하라고 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몇 차례 중창하였다. 국보1점, 보물 9종 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조계종 13교구의 본사이다.
쌍계사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져 매우 아름답다. 나무의 크기들도 예사롭지 않다. 적어도 이런 길은 차를 타지 말고 걸어서 올라가야 절에 대한 예의인 듯하다. 일주문을 통해 멀리 팔영루의 모습이 올려다 보인다.
건장하지만 고풍스럽지 않은 백창기 부부가 시주하여 1990년에 지은 9층 석탑을 살짝 돌아 팔영루 옆으로 우각진입하면 대웅전 마당이 나온다. 뜬금없이 진감대사 탑비가 놓여 있다. 부도는 없는데 처음부터 만들어 지지 않은 듯 하다. 대웅전 앞에 탑비가 놓여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마당에는 두개의 석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설명이 없는 5층 석탑이 놓여 있다. 아마 쌍계사 지진 때 탑두가 무너진 금당 앞에 있던 오층 석탑을 옮겨 놓은 모양이다.
대웅전 오른편으로는 뜬금없이 마애여래좌상이 하나 있다. 설명에 따르면 고려시대 작품인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이다. 돌을 파내어 감실을 만들고 가운데 불상을 위치하였다. 머리가 크고 얼굴도 살이 붙어 있어 후덕한 모습이다. 약사여래라고 하는데 약함을 찾을 수가 없다. 고려시대 작품이 그렇듯 토속적인 느낌이 물씬 스며 나오는 마애불아래에도 조그마한 재단이 차려져 있다.
쌍계사 대웅전 뒷편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다. 금강계단에서 금강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戒)란 의미가 있다. 또 계단(戒壇)이란 불교에서 불교를 깊이 믿는 사람끼리 계를 주고받는 장소를 말한다. 계(戒)라는 것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꼭 지켜야할 윤리적 덕목(德目)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통도사, 금산사, 비슬산 용연사 등에 금강계단이 있다.
쌍계사 금강계단은 석종형 부도로 2007년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부처님 진실사리를 모시고 조성하였다고 한다. 보통 진실사리가 있는 곳에 있는 적멸보궁은 없다. 금강계단 앞 전각은 불상이 없는 적멸보궁이 아닌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이 모셔진 대웅전(보물 제500호)이다. 뒷편에는 시주 받아 최근에 조성한 금강계단마애삼존불(金剛戒壇磨崖三尊佛)이 있다.
금강계단을 돌면서 이야기하는 두 분의 스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 쌍계사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 시배지가 계곡 아래에 있고 벚꽃 길도 유명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산을 넘어가면 4.5km 거리에 삼성궁이 있다.
쌍계사는 지반도 움직였던 곳이지만 차로 마음을 열게 하고 조용한 산사에 퍼졌던 범패 음악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고찰이기도 하다. 정적인 심산유곡의 고찰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 쌍계사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1. 김성균, 1998, 1936년 지리사 지진에 대하여, 한국지진공학회, 1998년도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p.66~70
2. 선창국, 정충기, 김재관, 2008, 쌍계사 오층 석탑 부지의 지진 응답 특성 평가를 통한 1936년 지리산 지진 세기의 정량적 분석, 대한토목학회논문집, 제28권 제3C호, p.18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