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왕산리 지석묘(旺山里 支石墓, 경기도 기념물 제22호)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낙엽이 흩날리는 날씨에 성묘길에 나섰다. 산소는 집에서 지척인 용인이다. 가족 납골묘에 모신 조부모님을 뵙는 길에 이전 세기를 살아오신 그분들의 삶을 상상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전기차가 지나가고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고 하늘에는 인천공항과 김포로 가는 비행기와 뭐가 바쁜지 헬기도 날아다닌다. 모두 따뜻한 커피 한잔이 필요해 찾은 카페 이름이 고인돌 카페였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꼽는다. 신석기시대에는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빗살무늬토기가 대표 유물이었는데, 청동기시대에는 무늬가 다 없어졌다. 청동기 사람들은 모래바닥 해안가에서 구름이나 하천변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당연히 뾰족한 항아리 바닥은 없어지고 바닥이 평평한 민무늬토기가 나타난다. 청동기라는 권력을 반영할 대상이 나타남으로써 그릇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고 무늬는 없어진 것이다.
또 다른 청동기 시대 유물은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3~4만 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장소는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구릉지대이다. 고인돌의 등장 시점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남한에서는 기원전 11~10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나 부속시설이 청동기 시대 전기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나타나는 석관묘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고인돌과 석관묘의 구분이 지역에 따라 모호하기도 하다.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석기시대에는 돌을 사냥과 생활의 도구만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돌은 생활 도구만이 아닌 건축 자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지역적, 혈연적 공동체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큰 돌이 이용되었는데 지금도 시골마을 입구에는 큰 돌로 마을의 이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도 한다.
고인돌은 함께 발견되는 유물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고인돌의 겉모습, 죽은 사람을 안치하는 장소의 구조적 특징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눠진다. 북방식은 힘을 받는 긴 벽을 만들고 덮게 돌을 얹어 이후 짧은 벽(마구리 벽)으로 막아 시신을 유물과 놓는 방식이다. 시신을 모시는 장소(돌방)가 지상이라는 점이 남방식과 차이가 난다. 마구리 벽이 힘을 못 받기 때문에 대부분 넘어지고 없어지는 게 보통이다. 남방식은 땅을 파고 돌방을 만든 후 받침돌 위에 덮게 돌을 올리는 형태이다. 탁자의 다리가 없어 바둑판처럼 보인다. 개석식은 받침돌이 없는 형태이다.
북방식은 북방식은 동해안 쪽에는 거의 없고 서해안 쪽으로는 평안도와 황해도에 가장 많이 발견된다. 남쪽으로는 고창 이북으로만 나타난다. 남방식은 중부지방에는 없고 영남과 호남지방에서만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고인돌이 규슈 지방에서만 발견되는데 거의 모두 남방식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지석묘가 북방식이 남방식으로 발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용인 왕산리 지석묘
광주와 용인을 잇는 45번 국도변에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입구에는 고인돌 카페가 있고 그 옆에는 멋진 고인돌이 2기가 있다. 카페에서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다. 동서방향으로 있는 한 쌍의 북방식 고인돌 중 동쪽 것(1호)은 서쪽 입구 쪽 마구리 벽이 없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서 있고, 5m 정도 떨어진 조금 작은 서쪽 것(2호)은 긴 벽이 넘어간 상태이다. 주변에 굄돌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고인돌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의 장축 방향인 동서방향은 인근을 흐르는 관청천의 방향과 같다.
1호 고인돌의 덮게 돌은 길이 5.7m, 너비 4.05m의 평면 사다리꼴이다. 두께는 1m 정도 된다. 굄돌의 길이는 긴 벽은 2.84~2.98m, 마구리 벽은 1.06m이다. 지상에 노출된 높이가 0.8m에 이른다. 제대로 북방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당당하고 웅장한 느낌이다. 덮게 돌과 굄돌 사이에는 작은 쐐기돌을 끼워 넣어 구조적인 안정성을 도모했는데, 선조들의 뛰어난 기술성이 엿보인다. 고인돌의 높이는 1.6m 내외이다. 2호 고인돌은 길이 2.6m, 높이 0.8m이다. 주변에 이 외에 10기의 지석묘가 발견됐다고 하는데 이 지역에 대규모 지석묘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호 고인돌의 덮게 돌의 대체적인 무게는 편마암의 밀도를 2.5g/평방 cm라고 할 때, 대략 57.7톤에 달한다. 이는 건장한 사람이 평균 100kg 정도의 무게를 이동시킬 수 있다고 할 때, 최소한 580명 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가정했을 때, 이 고인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은 최소 2,000~3,000명 이상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마을은 커봐야 100채 이하의 집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니 이를 만든 집단의 크기가 상상이 된다.
고인돌은 보통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에는 삶과 죽음의 공간을 크게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는 논농사와 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을 단위의 의례와 협동, 조상신 숭배 등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 정착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가장 원형질을 접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인돌을 둘러싼 경제, 사회, 기술 전반에 걸친 모습을 상상하고 밝혀 내는데 고인돌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고인돌은 경안천에서 약 400m도 안 되는 거리의 편평한 구릉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남북으로 백마산(460.6m) – 정광산(562.1m)이 달리고 있다. 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곤지암 스키장이 나온다. 주변 지질은 선캠브리아기 호상편마암이다. 고인돌의 단면에 곡선을 이루는 호상 구조의 띠 모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절리에 따라 판상으로 떨어져 나온 바위 덩어리를 발견하고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외국어대학교가 위치한 골짜기의 양편 어딘가에서 채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인 지역에는 상하동, 주북리에 탁자식 고인돌이 있고, 유운리, 장평리, 맹리에 개석식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왕산리 지석묘가 위치한 45번 국도 주변에는 현재도 많은 묘지가 존재한다. 옛 청동기 시대 사람이 쓰던 묘지터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무덤이 만들어지고 사라져 갔는지를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고인돌은 현재의 석재 봉안묘와 다르지 않다. 벽을 세우고 뚜껑 돌을 덮는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우리도 부장품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옛날의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석기시대부터 21세기까지 왔지만 진정한 진화 또는 발전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하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기나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커피값이 저렴한 고인돌 카페와 대방어와 참숭어가 들어왔다는 고인돌 횟집이 있다. 차는 바로 앞 무료 공용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청동기 시대로 살짝 다녀오는 짧은 여행지로 좋은 곳이다.
참고문헌
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박정근 외, 2004, 한국의 석조문화, 다른세상
3. 한국 고고학 강의, 2012, 한국고고학 강의, ㈜사회평론
4. 동북아지석묘연구소, 2014, 화순 고인돌의 나라로, 지성사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