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과학 이야기
1922년 12월 11일, 조선총독부는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나이 68세가 넘은 홍릉 능참봉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순종에게 '허락 없이 비를 세운 죄'를 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엄청 홍보가 되었고 구경하려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신도비를 천으로 가려놨지만 민중의 봉기가 두려워 비석을 파괴하거나 글자를 없애지도 못했다.
문제의 발단은 1919년 고종이 서거한 뒤 4년이 넘도록 일제는 비문의 대한이라는 자와 황제라는 이름을 시비 걸어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1895년 변을 당한 명성황후의 비석에는 고종과의 합장을 염두에 두고 '대한/□□□□□홍릉/명성□황후□□'라고만 만들어 놓았다. 비석이 지연되는 것에 분노를 느낀 늙은 능참봉 고영근(高永根, 1853 ~ 1923)이 몰래 '대한/고종태황제홍릉/명성태황후'라고 채워 넣었던 것이다.
그 신도비는 현재 남양주 홍릉의 비각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다. 돌에 새긴 것을 지우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기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더 어렵다. 왕실을 담당하던 이왕직에서도 소동이 벌어졌고 일본 왕실 궁내성에까지 의견을 묻고 난리가 났다. 능참봉 고영근은 민영익의 청지기로 궁중에 드나들다 고종의 눈에 띄어 출사 했다. 무관과 정치인으로 활약하다 명성황후를 암살에 참여한 우범선을 일본에서 죽이고 5년을 복역한 후 풀려나 귀국했다. 1921년 3월 홍릉의 능참봉이 되었고 비석사건으로 1923년 3월 파면됐다. 12일 후 홍릉 근처 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소가 있는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서 석운동으로 넘어가는 옛길로 산을 넘으면 전주 이 씨 덕천군파 신종군 계열* 문중의 묘가 몇 기 있다. 가장 처음에 만나는 경기도 기념물인 이경석선생의 묘는 당시의 묘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케이스인데, 입구의 신도비가 특이하다. 차 여럿을 세울 수 있는 넉넉한 주차장과 길가에 접한 둔덕에 3개의 비가 서있다. 신도비 2개와 문학비가 그것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인가 보다.
*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10남 덕천군 이후생의 장남 신종군 이석을 파조로 하는 전주 이 씨의 분파. 결국 임금의 종친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경석 선생묘는 부인 전주유씨와 합장묘이고 봉분 방향 우측에는 묘비가 있다. 묘역은 약 100여 평이고 봉분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서있다. 망주석은 8각으로 석수 조각이 양각되어 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이다.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돌과 계체석, 4각과 6각의 향로석 2기, 장명등(후대에 설치한 것)이 있으며, 봉분 방향 좌측에 별도의 포게진 상돌과 4각 향로석가 있다. 옛 것과 최근 것이 혼재되어 있다. 새것은 잘 연마된 석재다.
묘갈은 1751(영조 27)년에 건립되었는데 재질은 백색 대리석(결정질 석회암)이다. 비신은 예서체(隷書體)의 비문은 네 면에 있으며, 앞면에 세로 석 줄로 “有明朝鮮國領議政文忠公/白軒李先生景奭墓/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유명조선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현손인 이광회(李匡會)가 찬하고 유명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가 멋지게 썼다. 비의 총높이는 183㎝로, 비 좌 높이 42㎝, 너비 92 ㎝, 두께 60㎝이고, 비신 높이 162㎝, 너비 상 53㎝, 하 50㎝, 두께 21.5㎝이다. 옥개석은 없다.
왼쪽에 서있는 신도비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은 잘 연마되어 있는 대리석(또는 사암) 석재 자체이다. 비신 상부에는 “領議政諡文忠公神道碑銘(영의정시문충공신도비명)”이라는 제액(題額)만이 음각되어 있고 아래에 있어야 할 비문이 없다. 비석을 올려놓은 비좌에는 4면에 당초문과 상부에 복련문향을 새겨 놓았고 깔끔한 옥개석도 올려 있어 제대로 형식을 갖춘 비석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글도 씌여지지 않을 걸까? 검은 오석으로 만든 가운데 비를 보면 글자가 가득하다.
경기도에서 설치한 안내판에 따르면 비문은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이광사(李匡師)가 써서 1754(영조 30)년에 세웠는데 노론 문인들이 비문을 훼손하여 1975년에 새 신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신의 높이는 252㎝, 너비 86㎝, 두께 43㎝이다. 신비는 오석이며 규모는 비 높이 259cm, 너비 84cm, 두께 40cm이다. 꽤 크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선조 28~현종 12)은 인조에서 효종, 현종의 3대에 걸쳐 50여 년 동안 험악한 난국을 헤쳐 나가는데 공헌한 재상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상보(尙輔), 호는 쌍계(雙磎) 또는 백헌(白軒)이다.
이경석은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서 삭적(削籍)되었다. 세월이 흘러 인조반정 시(16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인조 2) 때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이어서 봉교, 전적, 예조좌랑, 정언, 교리 등을 거치고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체찰사 장면의 종사관으로 일했다.
*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서 세종(世宗) 때 젊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은가(恩暇)를 주어 독서(讀書=공부)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된 제도인데,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하여 문신(文⾂)의 명예로 여겼으며 출세 길도 빨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대사헌(사헌부의 수장, 종 2품, 관리 감찰 및 기강 단속)·부제학(홍문관의 수장, 정 3품, 경연, 문서관리 및 자문)에 임명되어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이듬해 인조의 간청으로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찬진(撰進)하였다. 인조 20년(1642) 김상헌과 함께 척화신(斥和臣)으로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 좌의정 등을 거쳐 효종 즉위년(1649)에 영의정에 올라 효종의 북벌정책에 참여하였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로 심양에서 어려운 대청외교(對淸外交)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듬해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들어온 사건으로,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하라는 청나라의 명을 받고 서북지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 황제의 노여움을 사 영불조용(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의 조건으로 귀국, 3년 동안 벼슬을 못했다. 1644년에 복직되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인 1645년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지는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사문, 치죄하고자 하였다. 이경석은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지만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국왕이 구명을 간청하여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였고, 청나라 황제의 명에 의하여 다시 영불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53년(효종 4)에 다시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 1659년(효종 10)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년(현종 9) 신하의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이경석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성남의 판교로 옮겨 살다가, 뒤에 지금의 석운동에서 만년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남원의 방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 등 유집 50여 권이 있다.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각종 중요 직위에 모두 올랐고 당시 정세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존경과 천수를 누린 나름 다복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는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왕이 지팡이 <장(杖)>와 의자 <궤(几)>와 가마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현종 9년(1668) 11월 왕이 원로대신이었던 이경석에게 공경의 뜻으로 내린 궤 1점과 장 4점 그리고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 6점의 유물이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보물 930호). 궤장은 조선초기에는 쏟아져 나왔으나, 이후에는 한 임금이 한두 명씩만 주었다. 선조 때는 노수신, 인조 때는 이원익, 현종 때는 이경석, 숙종 때는 허목이 받았다.
궤는 높이 93㎝, 폭 77.4㎝로 앉을 때만 펴고, 평상시에는 접어둘 수 있게 만든 접이식 의자다. 앉는 곳에는 단단한 노끈을 X자로 엮어 접어두기 편하게 만들었다. 뒤에 몸을 기대는 부분은 괴목으로 가운데 구멍을 뚫었고 등받이 표면을 자작나무의 껍질로 쌌다. 장은 지팡이인데 새(오리)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조두형(鳥頭形) 지팡이(189.5㎝)와 안에 칼이 들어있는 지팡이(149.5㎝) 그리고 삽모양의 지팡이(141㎝) 2점(각각 여름용과 겨울용) 등 총 4점이다.
사궤장 연회도 화첩(賜几杖 宴會圖 畵帖)은 궤장을 내릴 때 열린 잔치에서 의정부의 동서반과 대신들이 참석하고 예문관이 작성한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책이다. 이 그림은 3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지병궤장도>는 임금이 내리는 궤장을 맞아들이는 장면, <선독교서도>는 임금이 내린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 <내외선온도>는 궁중에서 보낸 악사와 무희들이 연주하고 춤추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가로 55.5cm, 세로 37cm이다.
벼슬이 정승까지 올랐어도 70세까지 수를 누린다는 것은 드문 일로 임금이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라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궤장은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전에서 제작했는데 당시 제작규정과 양식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공예품이기도 하며, <연회도 화첩>은 당시 풍속도로 회화적 가치가 큰 작품이라고 한다.
비록 노론 등 사림 세력이 헐뜯고 늘어졌지만, 곤궁한 왕이 신의와 노고를 다한 노재상에게 평생의 공헌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던 것이다. 입으로 주자와 예 만을 떠들고 아무 행동을 안 하던 이들은 노고를 다하지도 않고 오욕을 뒤집어 쓰지도 않았다. 왕을 대신해서 굴욕을 겪으며 종묘사직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공헌을 한 이는 백헌 같은 사람들이었다.
백헌 선생의 신도비에 얽힌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후에 노론의 거두가 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젊었을 때, 당시 서인으로 이조판서였던 이경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645년 이경석은 송시열을 천거하여 장령에 올려 줬다. 하지만 통혼 요청이 이경석에게 거절되자 점점 안 좋은 마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3년이 이경석이 궤장을 받을 때, 송시열은 편안하게 오래 잘 살았다는 의미로 ‘수이강(壽而强)'이라고 축하의 글을 보냈다. 이듬해 온천대왕인 현종이 또 온양으로 갔는데, 이때 유도대신을 맡은 이경석은 “군왕이 병 치료를 위해 멀리 가는데 문안드리러 오는 사람이 없다”라고 세태를 나무라면서 왕은 빨리 돌아오라고 채근한다. 이때 대전 회덕에 있던 송시열은 제 발이 저렸는지 이경석을 더 미워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려지기를 수이강이라는 말의 뜻도 오랑캐에게 글을 써주고 편안히 살았다고 비아냥하는 뜻이 담겼다.
이경석이 죽고 송시열도 죽고 세월이 흐른 후 1703년 신도비문는 당시 74세이던 소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맡겨졌다. 이 글에서 박세당은 이경석을 군자의 상징인 ‘봉황’이라 하고, 송시열을 불선자의 상징인 ‘올빼미’라 했다. 이경석을 나라의 전형(典型)인 ‘노성인’(老成人)이라 하고, 송시열을 그를 모욕하는 ‘불상인‘(不祥人)’ ‘불선인(不善人)’으로 평가했다. 이에 뒤끝 작렬한 노론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고 그의 글을 모두 불태우라고 왕에게 항의해서 관철시켰다. 이후 박세당이 복원됐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경석의 신도비는 아마도 비석에 조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1754년(영조 30)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후손들이 그리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현장에서 신도비를 보면 크기만큼이나 재질에 감탄이 나온다. 정확한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육안상으로는 조립질 사암으로 보이며 생성 후에 2차적으로 충진 된 방해석이 선상 배열을 하고 있다. 270여년이 지난 비석의 표면이 매우 매끈해서 방금 공장에서 출고된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하다.
비석 등 석물은 원하는 형태를 얻기 위해 원석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이때 암석의 결, 절리의 형태 등을 잘 살펴서 잘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후에 암석이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고 원하는 형태를 얻을 수 없다. 그다음에는 대체적인 형태로 표면의 거친 부분을 정리하여야 한다. 이때 암석, 모래 등을 이용하여 갈아내는데 상상하는 것처럼 암석을 갈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고 고된 작업이다. 갈아내지 않으면 글씨나 문양을 또렷하게 새겨 넣을 수 없으며 지의류 등이 자라면서 암석 표면이 빨리 훼손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이경석의 신도비에서 상단의 제액을 제외하고는 원래 글이 적혀 있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다. 특히 중앙부의 큰 방해석 부분은 각인이 되었다면 이미 떨어져 나갔을 것인데, 아직도 잘 부착되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만일 전체 비문이 각인되어 있었고, 이를 지금의 형태로 평활하게 갈아냈다면, 제액과 비문이 있는 부분에 높이 차이가 나야 한다. 하지만 비석에서는 그런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비문을 훼손시키는 일반적인 방법은 앞의 고종 황제 비의 사례에서 보듯, 글자를 쪼아내는 것이다. 갈아내지는 않는다(그 흉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호태왕비를 다 갈아내지는 않았다).
요즘도 암석의 삭마작업(깎고 광을 내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전기장비가 없던 당시에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고, 만일 비문이 있었고 그걸 지워 지금과 같이 4면이 매우 깨끗하게 만들었다면 아마도 비문을 세기는 것만큼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정황상 비석을 훼손시켰다고 의심받는 세력들의 행태에서 그런 정성을 바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필자는 구 신도비는 미완성의 신도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신도비의 목적은 돌아가신 분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그 공적을 한정된 공간에 다 적을 수는 없다. 때로는 적지 않고 놔두는 것이 그 연유에 궁금증을 갖게 하고 결과적으로 공적을 찾아보게 하여 당초에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끄럽게 주장만이 난무하고 행동은 적었던 시대, 난국을 어깨에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낸 선비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참고자료
1. 박종인의 땅의 歷史, 텅 빈 비석 속에 추잡한 정치인들이 보인다, [173] 이경석 신도비에 숨은 노론(老論) 정치의 본색, 조선일보, 2019.7.17
2.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문화재연구소, 2015
4. 힘없는 군주 바로세운 역대 최강 능참봉, 동아플레시100, 1922.12.13
5.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