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온전한 유물, 김해 파사석탑

문화유산 지구과학

by 전영식

수많은 김해 김 씨의 시조인 가야국의 초대 국왕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 42~199)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 북쪽 구지봉에서 6개의 금란(金卵) 중 하나로 태어났다. 트럼프처럼 금을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먼저 깨어나서 바로 왕이 되었다. 원래 종친회에서 화강암으로 '천강육란석조상'을 만들어 구지봉에 설치했지만, 문화재청에서 고증되지 않았다(가능이나 한 이야기일까)고 퇴짜를 맞아 현재는 수로왕릉(사적 제73호) 밖 연못 구석에 밀려나 있다.


20260211_140257.jpg 김해시 수로왕비릉, ⓒ 전영식


'구지가'로 유명한 구지봉(龜旨峰, 해발 20m)은 현재 수로왕비릉과 국립김해박물관 사이의 야산을 의미한다(사적 제429호). 거북이 몸통 쪽인 수로왕비릉에서 머리 쪽인 구지봉으로 일제가 잘라놓은 길을 복원한 구지터널을 위로 건너 올라가면 산 정상(구수봉)에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하나 있다. 거기에 각자 된 '구지봉'이라는 글을 쓴 사람은 한석봉이라고 전해진다. 이 뜬금없는 남방식 고인돌은 240 ×210 ×100cm로 자그마하다.


20260211_140705.jpg 구지봉 정상 ⓒ 전영식

스치는 생각으로 이슬이라는 측면에서 김수로와 진로(참이슬)에서 두꺼비 대신 거북이를 쓰는 주류 브랜드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참고로 초창기인 1924년 진로의 상징은 원숭이도 있었다고 함).


파사석탑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許黃玉, 32 ~ 189) 뿐 아니라 가야의 이야기는 다양하고 끝이 없지만, 실물로 볼 수 있는 유물은 딱 하나 있는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를 보면 권 제3 두 번째로 실린 파사석탑(婆裟石塔, 경상남도문화재자료)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평형석 역할을 했을 파사석탑이 없었다면 허황옥이 금관국에 올 수 없었고 수로왕과 결혼도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저런 모습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48년) 만든 것으로 언급된 석탑이다. 물론 당시에 인도에서도 탑 형식이 만들어 지지도 않았고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례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4 각형 지대석 위에 연화석 굄대를 따로 만들어 그 위에 6개의 부재로 5층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데 돌의 재질로만 보면 6층이 맞지만 불교에서 석탑의 층수를 홀수로 쓰기 때문에 5층으로 부르는 듯하다.


전지혜(2019)에 따르면 각 층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가로세로는 1층 80cm, 2층 58cm, 3층 44cm, 4층 32cm, 5층 58cm) 두께는 18cm로 일정하다.


20260211_135916.jpg 파사석탑, ⓒ 전영식


폐사된 호계사(虎溪寺)에 있던 것을 조선시대 김해부사로 부임했던 정현석(鄭顯奭, 생몰미상, 부사 재임시기 1870.6.8~1873.12.27)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 ”라고 하여 1873년 수로왕비릉 앞으로 옮겼고, 1993년 현 위치로 파사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 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하여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천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파사석탑은 무슨 돌인가


지질학자도 아닌 스님 일연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하였다는 파사석탑은 무슨 돌일까?


20260211_140033.jpg 파사석탑 아래쪽 3개의 부재, ⓒ 전영식


외형적으로 관찰해 보면 하얀색의 층리를 갖은 퇴적암에 광화용액이 주입되면서 암석이 부수어지고 그 사이를 충진 한 일종의 각력암으로 보인다. 보통 고온 고압의 유체가 층상의 퇴적암을 뚫고 들어 올 때 기존 암석이 파괴되는데 그 범위는 암석의 층의 범위로 제한된다. 파사석탑의 각 부재의 두께가 18cm로 동일하다고 보았을 때, 각 부재는 이 정도의 층후를 갖는 동일한 층에서 채취됐을 가능성이 있다. 두께 석영이나 방해석이 열극을 충진 하는데, 파사석탑은 특이하게 붉은색 암석이 충진 한 것이 관찰된다. 각력암은 각이 있는 암석이 포함된 일종의 역암이라는 뜻이다.


스코틀랜드 Achnahaird 근처의 각력암(편마암이 붉은 사암에 둘러싸여 있음), 위키미디어: Anne Burgess


암석을 사진으로만 보거나 눈으로만 보고 판정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문화재는 함부로 만져보거나 껴볼 수도 없다. 같아 보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물의 차이가 나는 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9년에 고려대학교에 의뢰하여 비파괴검사를 한 비공개 결과가 있는데, 흰 암석은 사암이고 여기에 엽랍석(일명 납석)이 섞여 있고, 층리와 균열면을 채운 암석에는 적철석이 들어가 있어 붉게 보인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엔 퇴적암 지역에서 낮은 심도에서 열수작용이 있던 곳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엽랍석(Pyrophyllite)은 화학식 Al2Si4O10(OH)2인 층상 규산염 광물로, 흔히 '곱돌'이나 '납석'으로 불린다. 납석(곱돌) 문화재는 주로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사리호(사리 항아리)가 대표적이며, 짙은 회흑색을 띠고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다. 주요 문화재로 국보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와 보물로 지정된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가 있다.


국보 전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2014년 국보 동산 앱사진).jpg 국보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일연 스님이 지질학에 식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암석이라고 이야기했는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암석은 지리적인 특성이 적은 물질이다. 이런저런 지질학적 환경이 맞으면 만들어지는 것이 광물이고 암석이다. 지금은 전국이 개발되고 집과 도시가 형성되어 그럴듯한 암석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분명히 예전에는 지금보다는 전형적이고 특이한 암석이 많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없는 것과 원래 없는 것은 다르다.


지금도 김해에는 외래인이 많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유타국이 정확히 어디 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일국의 공주이고 많은 혼례품을 가지고 왔고, 다수의 수행원과 왔다는 점이다. 허황옥은 김수로와 결혼했지만 같이 왔다는 20여 명의 수행원들이 이 땅에 남았는지 떠났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얼마간은 김해에 머물고 사람들과 어울였을 것은 분명하다.


20260211_134344.jpg 김해동상시장 근처, ⓒ 전영식
20260211_134406.jpg 김해동상시장 근처, ⓒ 전영식


지금 김해 시내, 수로왕릉 인근의 김해동상시장 버스정류장에 가면 외국어로 쓴 간판이 즐비하다. 심지어 사람들도 한국인반 외국인반이다. 아유타국에서 오면 배가 닿는 곳이 김해였다고 하고, 지금 외국에서 오면 김해국제공항으로 편하게 올 수 있다.


지질학에서 동일과정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지질학적 현상은 과거에도 동일한 방식과 속도로 이루어졌다는 원리이다. 지질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허황옥이 왔을 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고 추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도 2천 년 후 신화와 전설, 역사로 남을 수도 있다. 잘 대해줘야겠다.


참고자료


1. 이거룡, ‘파사석탑 고찰-가락국과 아유타국의 해양문화교류 가능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4권,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 p. 413~449

2. 이거룡, 파사석탑(婆娑石塔)의 유래와 조성과정에 관한 연구,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6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 12, p. 641~675

3. 일연, 삼국유사,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94

4. 전지혜, ‘김해 파사석탑의 원형에 대한 고찰’, <진단학보> 133호, 진단학회, 2019

5. 한국 고대 사료 DB,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매거진의 이전글표암 강세황은 왜 부안에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