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지구과학 이야기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반도는 응회암과 유문암으로 만들어져서 그 경관이 독특하다. 북한산, 설악산, 속리산을 이루는 화강암 산지와도 모양이 다르고, 철원이나 한라산 같은 현무암산과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물론 화산암이기 때문에 주상절리도 나타나긴 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곳은 관광지로 인기가 높고 역사를 통과하면서 사찰이나 산성 등이 설치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안 변산반도에도 내소사, 개암사, 우금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옛 산수화를 보면 변산반도의 모습은 보기 쉽지 않다. 대부분 그림은 금강산, 단양, 동해안의 명승지 아니면 서울 근교다. 그런데 시화서와 그림평론에서 유명한 표암 강세황이 부안을 여행하고 그림을 남겼다. 부안에 무슨 특별함이 있었던 것일까?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은 숙종 39인 1713년에 태어나 정조 15인 1791년에 77세로 사망한 조선의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신이자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고 불렸던 문인예술가다. 숙종, 경종, 영조, 정조의 변란 없던 시대를 살았다. 집안이 좋아서 조부 판중추부사 강백년(姜栢年), 부친 행판중추부사 강현(姜鋧), 강세황 본인까지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하는 영예를 누렸다. 위 사진은 이를 기념해서 추사 김정희가 써 준 현판이다.
강세황은 강감찬과 함께 고려시대 귀주대첩에서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 963~1021)의 후손이다. 표암은 예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鋧, 1650~1733)의 64세에 막내아들로 서울 남소동(현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예조는 오늘날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교육부, 인사혁신처, 외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육조 중의 하나인데 정말 일만 많고 빛나지 않는 자리다. 그걸 집안에서 대를 이어했으니 그 집안의 행정적 능력은 사줄 만하다.
표암의 형인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문제였는데, 과거시험에서 부정이 들통나 변방으로 유배(1713년) 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이에 동조한 혐의를 받아 하옥 후 또 유배되었다. 덕분에 가세가 기울어 강세황은 32세부터 60세 초반 출사하기까지 처남인 해암 유경종(海巖 柳慶種) 집안이 있던 경기도 안산 처가에 의탁하며 연객(煙客) 허필(許佖) 등과 교유하며 벼슬 없이 세월을 보냈다. 39세쯤 7~8세이던 꼬마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18?)를 만난다. 표암과 단원은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그림(송화맹호도)도 같이 그리며 일평생을 함께 보내게 된다.
1763년 형 강현이 신원되면서 강세황의 집안은 복권되었지만 표암의 나이는 벌써 50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영조가 1773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영릉참봉으로 제수했지만 나이를 핑계로 사임하고, 정조 원년인 1776년 64세에 나이 든 유생에게 보이는 기구과(耆耈科)에 수석을 하였고 1778년 66세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1781년 정조의 30세 어진 제작에 총책임자로 참여하였고, 이때 주관 화사 한종유에게 초상화를 의뢰해서 그렸는데 이게 '강세황 육십구세상(姜世晃 六十九歲像)"이다.
그 후 1784년, 72세의 노령임에도 청나라 건륭황제의 천수연(千壽宴) 때 부사(副使)로 북경을 다녀왔다. 이때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표암의 그림을 보고 '미하동상(米下箽上, 미불보다는 아래이나 동기창보다는 낫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미불(1051~1107)은 송대 화가 겸 서예가로 '미점법'과 '발묵법'을 창안한 사람이고, 동기창(1555~1636)은 명대 최고의 화가이자 서예가였다. 극찬이었다.
강세황은 출사 후 서울 낙산 아래 건덕방(이화동, 연건동, 동숭동 부근) 양지바른 곳에 집을 지어 살았다. 한성판윤 시절 이웃의 인평대군집인 석양루(夕陽樓) 부근 개울가 바위에 '총천취벽(紅泉翠壁)' 이라는 각자를 남겼다고 하는데, 지금 흔적은 없다. 석양루는 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을 거쳐 그 자리에 이승만의 거처였던 '이화장'이 세워졌다.
강세황은 정조 어진 작업을 마친 이듬해 70세(1782) 자화상을 그렸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 1669)는 유화와 판화, 드로잉을 합쳐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지만, 조선 시대의 자화상은 극히 드물게 나타나, 강세황과 윤두서의 자화상이 거의 유이하다(하지만 둘 다 수작이다).
자화상에서 강세황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오사모(烏紗帽)에 야인이 입던 야복(野服)을 입고 앉아 있는 전신을 그렸다. 몸에 착용한 옥색 도포와 함께 허리의 붉은 세조대(細絛帶)는 빨간 색채의 포인트를 주는 센스를 보인다. 얼굴은 선염(渲染) 중심의 부드러운 표현을 대신하여 화면 전면(前面)에서 여러 개의 필선으로 복잡한 주름을 치밀하게 묘사하였고 볼 쪽은 강한 음영을 넣었다.
이 자화상은 전반적인 형식은 야복본 초상화 같지만 관복에 착용하는 오사모와 일상에서 착용하는 야복의 조합은 평상시 함께 입을 수 없어서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화상의 상단 양쪽에 적은 글은 강세황이 자화상을 제작한 후 지은 자찬문(自撰文)인데, 왜 관모와 야복을 착용한 모습을 그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彼何人斯? 鬚眉皓白. 이 사람은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희다.
頂烏帽, 被野服. 머리에는 관리의 모자를 쓰고 몸에는 야인의 옷을 입었네.
於以, 見心山林, 而名朝籍. 마음은 산수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胸藏二酉, 筆搖五嶽. 가슴에는 만 권의 서적을 간직하였고 붓은 오악을 흔든다.
人乃得知? 我自爲樂. 세상 사람이 어찌 알아주겠는가? 나 혼자서 낙으로 삼는다.
翁年七十, 翁號露竹. 옹의 나이는 70, 호는 노죽(露竹)이다.
其眞自寫, 其贊自作. 그의 초상은 그가 그린 것이며 찬도 자기가 지은 것이다.
歲在玄黓攝提格. 임인년(1782)
강세황은 자신에 관하여 현실은 조정에 나가 사대부의 책임을 다하는 관료이지만, 마음만은 산수에 머무는 야인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즉 머리의 오사모는 관료로서의 자부심을, 몸에 걸친 도포는 문인적인 삶을 그리는 내면을 표현한 것이었다. 찬문의 끝에는 자신의 지식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 자화상과 찬문이 자신의 작품임을 강조하였다. 요즘말로 자뻑이다. 어쨌든 이 초상화는 조선의 초상화사에 길이 남은 걸작임은 분명하다.
표암(豹菴) 강세황은 그의 나이 57세 경, 부안을 여행하며 우금암도(禹金巖圖)》 또는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으로 알려진 산수화를 그렸다. 비록 스케치와 같은 형식이지만 실경산수화로 평가받는다.
우금암도는 1770년~1771년경, 둘째 아들 강완(姜俒)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770년 2월 혹은 이듬해 2월에, 이틀간 변산 일대를 유람하고 그린 그림이다. 51세 무렵 영조는 "사대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듣지 말라"는 취지의 당부를 했기 때문에 표암은 우금암도를 그릴 때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 그림은 당시 왕명을 어겨가며 그린 작품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그림은 2001년에 미국에서 미국인 교수와 중국인 학생에게 우연히 발견(!) 되었고,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에 소장되어 있다.
우금 암도는 7개의 화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측에서부터 우금암, 우금암(원경), 유우금암기, 문조, 실상사, 용추 그리고 극락암으로 끝난다. 우금암과 문조 사이의 장면은 지명이 적혀 있지 않고, 극락암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글에 의하면 실상사에서 월명암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눈길이 미끄러워 가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어 용추폭포로 갔다. 하지만 오히려 더 험한 길에 고생을 하였다며 “길이 험해 가마조차 타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라고 여행을 모습을 묘사했다. 암산(巖山)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붓에 물기를 줄이고 그리는 굵은 갈필을 사용하여 바위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모습이 실상사와 용추 그림에서 돋보인다.
우금산성, 개암사
그림에 가장 처음에 나온 우금암을 포함하여 쌓은 산성이 우금산성인데,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우금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포곡식 석조 산성이다. 울금산성이라고도 한다. 우금산성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의 복신장군과 승려 도침이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내세우며 최후 항전을 벌였던 곳이라 보고 있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전투인 백강 전투가 벌어졌던 동진강을 지척에 두고 있다. 조선말에 부안·김제·고창·태인·흥덕·고부를 중심으로 태동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고장이기도 하다.
변산국립공원 지역은 경기육괴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원생대, 신원생대 기반암과 이를 피복한 중생대 화산암 지층이 있어 경기육괴의 지체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에 다양한 지층이 발달한다. 그림에서 나타난 개암사 지역의 암석은 삼예봉 유문암(지질도에서 녹색 ㄱ자 표시 지역)으로 불린다. 삼예봉 유문암은 하위 변산응회암을 덥거나 관입하고 있는 유문암을 통칭하는 층서단위다. 삼예봉유문암은 부안화산암 동쪽지역인 상서면 청림리와 감교리 지역 그리고 서쪽지역인 변산면 마포리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삼예봉유문암은 주로 괴상 내지 유상구조(flow band structure)를 보이는 담홍색의 암상이 주를 이룬다. 이들 내부에는 잔자갈에서 왕자갈 크기의 구형 다결정 구조인 spherulite(구정, 球晶)가 잘 관찰되는데, 이들의 내부는 이차 광물들(석영, 장 석 등)에 의해 절반쯤 내지 전체적으로 채워져 있다.
유문암(Rhyolite)은 규산(SiO2) 함량이 69~70% 이상으로 매우 높아 점도가 큰(유동성이 작은) 밝은 색의 화산암(분출암)이다. 화강암 성분의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분출한 것이다. 석영과 알칼리장석이 주성분이다. 점성이 커서 용암이 잘 흐르지 않아 종 모양의 화산을 만들거나, 흐름 줄무늬(유상구조)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백두산, 부산 장산일대가 대표적이다.
강세황은 본인의 그림 솜씨뿐만 아니라 많은 후학을 길러내고 주변 화가들과 교류하며 당시 예원의 총수라는 호칭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자신의 입지를 위해 거들먹거리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담졸 강희언 등과 높은 심미감으로 폭넓게 교류하였다. 왕에 의해 그림을 접었을 때에는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미술 비평가로서 자취를 남겼다. 강세황은 역동적인 18세기 예술계에서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강세황이 부안의 명성을 듣고 찾을 만큼 부안의 풍경은 색달랐던 것이다.
경기도 박물관에는 강세황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약간 코믹하게 묘사됐지만 인자한 선비의 모습의 강세황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이다. 강세황과 같이 우금암을 오르며 그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부안의 암석과 지질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꿈을 꾸어본다.
참고문헌
1. 군산, 부안, 방축도, 장자도 도폭 지질조사 보고서, 한국지징자원연구원, 2013
2. 변영섭, 표암 강세황의 우금암도와 유우금암기, 미술자료 제78호,2009-12
3. 지역N문화 역사문화유산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