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 Nov 24. 2023

SNS와 가면

아상(我相), 사회불안장애

#20231124 #SNS #가면 #아상


 진료하다 보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해 오는 병사들이 종종 있다. 사회에 있을 때는 자기 방에만 있어서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내왔지만, 강제로 낯설고 강압적인 사회에 던져지면서 적응을 어려워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은 어떻게 사회와 소통하고 지내왔을까? 몇몇은 SNS를 이용하는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X), 인스타그램 등등. 굳이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접하지 않아도, 실제로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가상공간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환자의 ‘아는 사람’ 혹은 ‘친구’가 알고 보니 그저 SNS에서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인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친구’에 대한 허들이 낮아진 건지, 아니면 내가 시대를 못 따라가는 건지 모르겠다. 


 코로나가 한창 떠들썩하던 몇 년 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개념이 세상을 휩쓸었다. 되지도 않는 2D 캐릭터로 가상으로 만든 회의실이나 교실에 모이질 않나, 제2의 지구라면서 부동산 투기를 하질 않나, 관련된 책도 쏟아져 나오고 머지않아 메타버스의 세상이 될 것처럼 난리를 치더니, (심지어 페이스북Facebook은 메타Meta로 회사 이름도 바꿨는데) 기술의 한계에 부딪힌 건지, 아니면 아직 인간에게는 얼굴과 살을 맞대야 하는 본능이 남아있는 건지 도로 잠잠해졌다. (H. Harlow의 애착 실험 결과를 생각해 보면, 동물이 촉각에서 오는 안정감을 포기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사람들은 다시 현실을 살기 시작했고, 메타버스는 다시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게임, SNS, 메신저 등으로. 


 생각해 보면, 나도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이름으로 놀았다. 버디버디로 친구들과 쪽지를 주고받고, 싸이월드라는 가상공간도, 미니미도 꾸미고. 캐릭터를 만들어서 게임도 하고, 가끔은 서로 부모님 안부도 묻고. 지금도 ‘초이’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이렇듯 가상공간에서 쓰는 계정들은 본래의 자아 겉면에 (상대적으로) 아무렇게나 걸쳐도 되는 가면 1, 2, 3…이 아닌가 싶다. 


 동성/이성 친구 간의 연락도 그렇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전화, 문자였는데, 요새는 SNS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더라. 연락처를 물을 때도 전화번호가 아니라 SNS 계정을 묻는다고 한다. SNS 계정보다 전화번호가 상대적으로 ‘나’의 개념에 더 가까워서, 쉽게 드러내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혹자는 개인 전화번호로 연락 오는 것이 싫어서 업무용 전화번호를 만들어 사회/업무적인 전화는 그쪽으로만 받는 사람도 있다. ‘나’를 분리한 것이다. 


 문득 SNS의 익명성이 아상(我相)을 더할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 써도 되는 가면만 잔뜩 늘리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융의 페르소나persona가 떠오르기도 한다. SNS는 분명 사람들에게 더 쉽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도구이지만,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건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얼마나 실제의 본인과 비슷한/다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인가? 혹은 얼마나 얇은/두꺼운/투명한/불투명한 가면을 쓸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맞대고 살아야 함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방식으로 맞대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직은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게 익숙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줄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적응하도록 만들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면을 두껍게 쓴다고 해도, 현실의 자기 자신은 그대로라는 점이다. 무슨 가면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버리고 바꾸고 고쳐야 하는 현실의 ‘나’이다. 현실의 나는 그대로이면서, 가면만 이것저것 바꿔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으랴? 적응을 어려워하는 병사들이 어떤 과거에 매여서 방에만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자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뿐이다. 사람을 안 접하고 살 수는 없으니 상처받더라도 조금씩 용기를 내서 자신의 경계를 넓혀갔으면 좋겠다는 게 내 이기적인 바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선의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